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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셈(×)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곱셈(×)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 송종복
  • 승인 2017.11.06 2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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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산술의 곱셈[乘(승): 곱] 역사는 중국의 진(秦)나라, 한(漢)나라의 <구장산술(九章算術)>이란 책에 나온다. 위(魏)나라 유휘가 <구장산술>에 주석을 붙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주석에 의하면 태고의 복희(전설적인 황제)가 처음에 8괘를 만들고, 구구의 셈법을 고안해 삼라만상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 후 당(唐)나라 시대에 와서 수학교육이 제도화돼 ‘산학(算學)’이라는 학교가 설립되고, <구장산술>을 비롯한 10종의 수학서가 교과서로 사용됐다.

 우리나라 구구셈은 지난 2012년 백제 사비성(현, 부여)에서 발견된 목간(木簡: 나무문서)에서 알 수 있다. 이 목간은 6-7C 경에 수학 공식을 써넣은 고대문서이자 최고의 수학사 관련 유물이다. 글자를 판독한 결과 ‘九六五十四’(9×6=54), ‘四四十六’(4×4=16), ‘四三十二’(4×3=12) 등의 구구셈 공식이 확인됐다. 당시의 구구셈은 오늘과 정반대로 9단에서 아래로 2단까지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구구법(九九法)은 1부터 9까지의 두 수를 곱한(9×9) 셈표를 가리키며 산수의 기본이다. 처음에 ‘九九八十一’(9×9=81)부터 시작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2계단부터 시작하는데 옛날에는 왜 어려운 ‘九九八十一’(9×9=81)부터 거꾸로 시작했을까. 이런 계산은 특수계급(귀족, 왕실)들은 알 수 있어야 하지만, 일반인은 몰라도 된다는 계급사회의 전유물이라고 본다. 요즘같이 어린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세금징수, 부역, 측량, 토목 등 계산에 필요하다는 것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고려 시대는 산학(수학) 시험이 있었다. 조선 초 정인지, 김종서가 쓴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때 산학시험을 3일간 봤다. 첫날 시험은 <구장산술>의 제9장 10조를 외워 보라는 구술시험이다. 2일에는 6장의 일부를 암송시키고, 3일에는 6문제를 푸는데 4문제를 통과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말기 예조판서를 지낸 남병길은 중국의 <구장산술>을 본떠 <구장술해>라는 수학서를 펴내 산술교본으로 삼았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보면 아전들이 백성들의 세금을 빼돌릴 때 어떤 백성의 집이 4결(오늘날의 평과 같음)이면 한 결에 쌀 6말(斗)씩 총 24두를 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곱셈이 많았다고 본다.

 <구장산술>에는 ①‘방전(方田)’으로 농지의 면적을 계산하는 것으로 최대공약수 등 분수계산, ②‘속미(粟米)’는 곡물을 교환할 때 환산법에 관한 것, ③‘쇠분(衰分)’은 수열의 합에 의해서 실생활에 적용한 것, ④‘소광(少廣)’은 제곱근, 세제곱근의 계산, ⑤‘상공(商工)’은 제방이나 토목공사 등 작업량을 계산, ⑥‘균수(均輪)’는 세금 징수할 때 곡물의 운반, ⑦‘영부족(盈不足)’은 과ㆍ부족 셈 문제를 다루는 것, ⑧‘방정(方程)’은 연립방정식문제, ⑨‘구고(句股)’는 피타고라스정리와 2차 방정식을 계산했다. 이같이 관리들이 세금징수, 부역 징발, 관개수로 사업 등을 할 때 복잡한 비율계산, 방정식과 피타고라스정리, 원주율 계산 등을 했다.

 필자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공부하는데 수학 공부가 전체과목에 비하면 과반수 이상이나 시간이 소비됐다. 초등 때는 셈본, 중학 때는 산수, 고교 때는 수학, 대학 때는 선택과목으로 진학할 때마다 산술과목 이름도 바뀌었다. 이같이 수학 때문에 전체 공부의 50% 이상이나 시간을 소비했다. 노벨상의 종류에는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등은 있으나 수학상은 없다. 이렇게 볼 때 왜 수학에만 판을 치는가. 여기에 과외가 판을 치고 사교육비가 춤을 추고 있다는 현실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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