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3:45 (금)
내 곁의 보석
내 곁의 보석
  • 김혜란
  • 승인 2017.11.15 1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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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 TBN ㆍ창원교통방송 진행자

  라틴어 수업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사고의 틀을 잡도록 지도해 인기를 끌고 있는 한동일 교수가 십년 전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일이다. 지난 2007년 가을, 작은 도시의 법원에서 일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라디오 클래식 방송을 듣는데 귀를 의심하는 연주가 들려왔다. 이탈리아 방송에서 우리 가락이 흘러나온 것이다. 우리 악기 소리가 들리는 순간 가슴이 뛰고 눈이 커진 그가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더니, 밀라노와 토리노 두 도시의 약자를 따서 지은 ‘mito 국제음악제’ 연주 실황중계방송이었다. 진행자는 한국의 ‘민속 음악’이라고 소개했지만, 연주된 곡은 정확히 우리 ‘정악’이었다고 한다. 이국땅에서 듣는 우리 소리인 만큼 애국가처럼 가슴을 뭉클하게 했는데, 더 감동이었던 것은 연주가 끝나고 진행자와 해설자가 주고받은 이야기였다고 회고한다. 두 사람이 모두 감탄하고 흥분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인즉 “이런 연주와 이런 소리는 처음이다”, “정말 환상적이란 말 밖에 다른 할 말이 없다”, “이 소리와 음악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환상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소리와 음악을 왜 알지 못했을까?” 등 이었다.

 한동일 교수는 외국에 가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또렷해진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악’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제목도 없었지만 연주와 소리라고 표현한 것으로 봐서는 정악 중 성악인 ‘가곡’이었으리라 확신한다. 가곡(歌曲)은 주로 시조시에 곡을 붙여 관현악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어떤 이는 얼마나 좋은 음악이었으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극찬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또 그렇게 외국인도 칭찬한 우리 음악을 어디 가야 들을지 알 수 없다고 우리 문화예술정책을 탓할지도 모른다. 혹은 경제적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나 비싼 티켓을 사서 거대한 공연장을 찾아야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창원 마산에 있는 가곡전수관 영송헌에서는 2017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기획공연이 있었다. 유네스코는 지난 2010년 우리 가곡을 인류 무형유산으로 올렸다. 가곡전수관 영송헌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가곡의 교육장과 가곡 전용 연주홀이 있는 곳이다. 이번 기획공연은 ‘교방가요- 옛 여인들의 아름다운 노래’라는 제목과 주제였다. ‘교방가요’는 1892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직접 기획해서 만든 진주관아 소속 교방의 음악들을 정리한 책이다. 절반은 ‘가곡과 가사’를 정리하고 나머지는 악기와 춤곡들과 가곡 연주에 필요한 것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실린 가곡 한바탕은 악곡 순서에 맞춰 노래가사를 다 실어놓아 이번 기획공연을 통해 실례를 재연할 수 있었다. 먼저 노래 부르면 답으로 노래를 부르며 이어 가는데 남녀 구별이 없고, 책에 있는 그림, 그러니까 ‘악기’와 ‘가객’의 사실화 속 배치대로 실연하는 무대를 만들어서 연주했다. 이번 기획공연에서는 가곡 이수자와 전수장학생들이 국악연주단 ‘정음’의 반주에 맞춰 가곡을 불렀고, 가곡 예능 보유자이자 가곡전수관장인 조순자 명인이 관객들에게 해설을 했다.

 몽롱한 듯 또렷한 듯 마음을 음률에 실어서 풀었다가 놓았다가 잡고, 다시 풀고 놓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자극적인 음악과 소리에 노출된 귀와 다른 감각들은 물처럼 순하고 바람처럼 여유로운 전통예술 가곡연주에 긴장이 풀려서 잠이 쏟아지기도 했다. 잠시 조는 순간이 지나면 마음과 생각이 명징해지면서 오히려 음률에 맞춰 지긋이 몰입할 수 있기도 했다. 느리기만 한 음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가곡 한바탕 공연에는 느긋이 시작해서 신이 오르기도 하고, 시조가사는 점잖기만 하지도 않아서 상상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부분도 있었다. 외국의 팝송이나 성악 종류, 혹은 우리의 민속 음악들은 달아올라 절정에 끝나는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가곡 한바탕은 점잖게 시작해서 서서히 달아올라 놀기도 하다가 마지막에는 그 달아오른 마음을 정리 정돈해서 말끔히 챙겨놓고 고요히 끝이 났다.

 이탈리아인들이 환상적이라며, 그런 연주와 그런 소리를 자신들은 왜 못 가졌냐고 했던 그 소리를 우리는 지척에서 만날 수 있다. 풍류 또는 정악으로 불리는 아정한 음악, 가곡이다. 명상하고 정신력을 키운다며 제법 비싼 대가를 치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요상한 인도음악을 들으며 마음 다잡으려 노력한다. 내 것 두고 남의 것으로 그렇게 내 정신을 키우려고 애썼다는 사실이 어리석게 여겨진다. 하루에 가곡 한 잎 유튜브로 찾아 들으며 정신을 맑히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일이 가능할뿐더러, 무료로 배울 수도 있다. 소중한 보석은 늘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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