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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에서 느낀 정서적 위안
‘엄마를 부탁해’에서 느낀 정서적 위안
  • 은종
  • 승인 2018.01.01 2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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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종 시인ㆍ독서지도사ㆍ심리상담사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산업구조사회의 어두운 그늘로 인해 정신적ㆍ심리적 피해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어떤 것을 갈구하며 어디에다 안정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싶은지 그 해답을 짚어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모두 4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돼 있으면서 시점 또한 다양하게 전개하고 있다. 발화자를 익숙하지 않은 ‘너’라는 단어를 사용해 엄마를 잃어버린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 엄마를 아예 잊은 건 아닌지 독자에게 공동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자손에겐 땀과 노동으로 뒤범벅돼 여인의 고운 자태마저 포기하고 살아온 우리의 어머니가 계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새끼를 낳고 안전하게 기르는 것은 모든 생물체의 본능이다.

 소설 속 ‘박소녀’라는 이름을 가진 엄마의 생애도 예외가 아니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는 더는 자신의 삶이 없어진 듯 오로지 그 일에만 전념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헤쳐 나가는 힘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해방 직후, 농경사회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은 치열한 삶이었을 것이다.

 어떤 힘든 일도 자신이 꾸려나가야 할 몫이며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삶에서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애정과 익숙함으로 믿었던 시동생의 처절한 죽음에 대한 목격, 어찌할 바 모르는 혼돈의 시간이 결코 엄마를 온전케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어떤 특별한 욕구를 지니고 사는 존재다. 배움에 대한 간절한 욕구가 좌절됐을 때 다른 어떤 것으로 보상받으려고 시도하지만, 그것마저 꺾여버렸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하곤 한다.

 작품 속 ‘균’이라는 인물은 꼭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좌절돼 그런 선택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하자, 살 의욕을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대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자살이라는 초점으로 갖다 대보니, 가족, 사회, 집단의 무관심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갖고 오는지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힘든 상황들을 겪으면서 엄마는 심한 충격을 받았을 테고, 남편마저 집을 비우는 날이 허다하니 미결로 끝나버리는 일상의 생활을 어떻게 정리하면서 살아갔겠는가 싶다. 정신적인 충격과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두통이 심해졌고 그것을 방치하고 견디며 살아온 엄마의 존재는 길을 잃어버려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결과로 우리 가슴에 허망한 느낌을 던져놓고 만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의 성격은 한 사람이라도 제 역할에서 이탈되면 다른 구성원 모두에게 근심거리가 되고 부조화로 인해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엄마 혼자서 농사일, 밭일, 가축을 기르는 일, 아이 넷을 키우는 역할까지 도맡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모성애가 있어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명언도 생겨났을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요, 뿌리다.

 아무리 시대가 혼탁해졌다 하더라도 자신의 모태인 어머니의 존재감은 항상 주위를 감싸 안으며 자식들의 가슴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다.

 반인륜적인 패륜아가 속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것을 침해하며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삭막한 시대에 이 소설이 던지는 화두는 ‘애정의 메마름을 어디에서 보상받을까’이다. 이제 누구로부터 위안을 얻을까 안절부절못하게도 만든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효심을 다하고 죽어 다시는 이 세상 사람이 되지 못했을 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를 미리 알려주는 적신호일 수도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해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가장 근원적인 가치와 메마르지 않은 정서적 위안감은 부모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하며 토속적이면서 자연과 밀접해 선택받은 언어들이 엄마를 찾았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문 속에 되뇌고 있다.

 ‘피에타’상(像)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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