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3:31 (금)
빛 좋은 개살구 ②
빛 좋은 개살구 ②
  • 양민주 시인ㆍ수필가
  • 승인 2018.01.15 2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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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민주 시인ㆍ수필가

 살구나무를 볼 때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우리의 속담이 떠오른다.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 맛없는 열매란 뜻으로, 겉만 번듯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개살구는 모진 풍상을 견디며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콤한 맛을 버리는 대신 화려한 겉모습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매화나무와 비교하면 모자란 듯 느껴지지만 잘살고 있다.

 살아가다 보면 남들과 비교되며 자기가 모자란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초라해진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게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던질 때 자기의 가치가 보인다. 세상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매화는 매화나무대로, 살구는 살구나무대로 만물과 어울려 자란다. 만물의 어울림에서는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도움을 받는다는 실정은 빚을 진다는 의미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는 혜택도 일종의 빚이다. 이렇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빚을 많이 지고 살아간다. 빚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 빚을 얻어 살아가는 방법도 하나의 기쁨이다. 건전한 빚은 서로 돕고 사는 따뜻한 정을 포함하고 있다.

 정원의 나무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집 떠나 야생의 살구나무 열매를 볼 때면 정원의 살구나무가 문득 떠올라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심경이 든다. 살구나무가 황금빛 열매로 나에게 눈을 즐겁게 하는 빚을 준 덕택이리라. 살구나무에 진 빚의 상환은 눈길로 마음을 주고받을 때 이루어진다. 해마다 빛 좋은 개살구를 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 아파트 빚을 갚아야겠다. 빛 좋은 개살구가 나에게 인생살이의 알심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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