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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황석산 전투,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선 황석산 전투, 역사교육의 장으로
  • 신진철
  • 승인 2018.02.13 2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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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철 해군 진기사 헌병전대 중령

 선조와 부화뇌동한 일부 관료 및 장수들의 무능함과 완고함,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 초래한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임란 7년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후폭풍이 실로 참혹했다. 그나마 제해권의 확보를 통해 조선의 존립을 지켜주던 조선 수군이라는 존재의 사라짐은 인간 존엄에 대한 파괴적 유전자로 무장한 왜군의 칼날이 광풍처럼 우리 땅 이곳저곳을 난도질하는 결정적 시발점이 됐다.

 남해안에서 제해권을 확보한 왜군들은 임진왜란 제1차 침공 당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치밀한 전략을 수립했다. 전쟁 지속능력 보장을 위해 우선 경상도를 경유해 조선반도 내 주요 곡창지대인 전라도 내 주요거점을 확보하는데 전력을 집중한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육십령고개를 배후로 하는 경상도 함양의 황석 산성은 전라도 방어를 위한 핵심거점이었다.

 지난 1597년 9월 우리 선조들은 임진왜란 7년 전쟁사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의병을 중심으로 군민, 곽준과 유명개, 조종도를 비롯한 장수들과 수천의 관군 모두가 이 거점을 방어하기 위해 수만의 왜군에 결연하게 맞섰다.

 인원과 전력 모두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던 상황에서 애초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임한 전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전에 분전을 거듭했지만 안타깝게도 곽준과 유명개 및 그 아들들은 전사하고 조종도는 스스로 전장에서 자결했다. 더욱이 격전 과정에서 돌을 나르며 사력을 다해 도왔던 부녀자들은 왜군들로부터 치욕을 당하느니 절개를 지키기 위해 절벽 아래 바위로 몸을 던져 순절했다. 바로 오늘날 황석산 피바위의 실존하는 유래이다.

 이전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인 남편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고 왜장을 유인해 남강에 함께 투신한 충절의 상징 논개의 생가터가 육십령고개를 넘으면 바로 전라도 장수군 장계에 있다.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절개와 의분 그리고 용기에 절로 숙연해진다.

 이는 흡사 기원후 73년 열혈당원 등 일부 유대인이 대로마 항전과정에서 일부 여인과 아이들을 제외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장렬히 생을 마감했던 그곳, 오늘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굳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사다 항전에 비견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는 우리 민족 항전사의 한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의 치욕적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고 선조들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현장에서 되새기기 위해 장교 임관식을 바로 이 마사다에서 거행한다고 한다. 이곳이 일반 학생들의 주요 수학 여행지 임은 불문가지라 할 정도로 명소로 손꼽힌다.

 반만년의 역사를 통해 수백 여 차례 이상의 외침 가운데서도 굳세게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투쟁적으로 민족사를 기록해온 우리 민족에게는 사실 유대민족의 마사다 항전사 이상의 자랑스러운 항전사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올바른 역사 인식의 지렛대로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 하는 활용의 지혜에 있다. 우리들 또한 우리 선조들의 투혼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을 역사교육의 산실로, 더 나아가 민족의 자부심을 고양시키고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반석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사를 수없이 직접 목도하는 산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일부의 무뎌진 민족사에 대한 정체성과 자긍심 그리고 상무 정신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현장에서 선조들의 숨결을 통해 이를 체득하는 자연스러운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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