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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직업윤리를 고민할 때
이제는 직업윤리를 고민할 때
  • 이태희
  • 승인 2018.05.01 2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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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희 김해중부경찰서 수사과 경사

 지난 3월 6일 경남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국내 드럼세탁기 모터 설계도면을 중국으로 유출한 연구원을 구속했다. 해당 국내 업체가 10년 동안 수백억 원을 투자해 한때 국내시장 점유율 90%까지 차지했던 세계 최고 수준의 고효율 모터를 고작 1억 6천만 원의 현금과 주택, 차량을 받고 넘긴 것이다.

 세간에는 졸렬한 천민자본주의의 발로라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구속된 연구원은 중국 현지법인 연구소장으로 연봉이 8천만 원이었다고 한다. 고작 기존 연봉의 2배에 해당하는 현금과 주택, 차량 제공이라는 알량한 조건에 눈이 멀어 설계도면을 유출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설계도면의 가치는 연구소장이라는 직책이 말해주듯 회사 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물론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할 바 없고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심성을 비난해야 한다. 더불어 회사 기밀을 외부로 유출할 수 없도록 기술적으로 보안 역량을 강화하고 관련 법령 또한 정비해야 한다. 실제 지금까지 수많은 산업기술 유출사건을 통해 저작권법부터 산업기술유출방지법까지 제도적으로 보완을 해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사건이 잊혀질만하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다시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기술이나 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도로 발달되고 개선된 반면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직업윤리다. 이제는 직업윤리를 고민할 때다. 우리 사회의 제도는 선진국과 비교해 결코 뒤처지는 수준이 아니다. 최근의 타워크레인 추락 사고부터 영흥도 낚싯배 전복사고, 세월호 사고 등 안전사고가 나면 사회안전망과 제도를 탓했지만 근본적인 발생원인은 결국 직업윤리가 실종된 개인의 잘못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드럼세탁기 기술유출 사건도 마찬가지다.

 사전에서 직업윤리를 찾아봤다. 해당 직업인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비행기의 기장, 여객선의 선장, 공무원같이 법으로 직업윤리를 규정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무형의 도덕적 잣대로 존재한다. 해당 직업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가 말한 ‘기업가 정신’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사명감 내지 책임감은 있어야 한다.

 물론 서양에 비해 근대화의 역사가 짧아 직업윤리가 제대로 체화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 사회는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단계를 넘어 개개인의 의식을 점검할 때라고 독려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됐다고 본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길 속을 뛰어드는 소방관,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침대를 붙잡고 온몸으로 아기를 보호한 산후조리사, 타박상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범죄현장을 급습하는 경찰관, 개인적인 확신이나 신념 혹은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오로지 엄격한 법의 잣대로 심판하는 법관, 자그마한 너트 하나가 제트엔진 팬에 걸려 비행기가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정비 장구마저 정위치를 점검하는 항공정비사, 그밖에 모든 직업군이 저마다 일정 수준의 직업윤리를 요구한다.

 구속된 연구소장도 직업윤리를 제대로 가졌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잔 고장 없고 효율 좋은 세탁기 개발에 주력하고 중국 시장을 개척하라고 회사는 그에게 연봉 8천만 원을 기꺼이 지급했다. 내가 만든 세탁기로 지구촌 수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빨래를 하게 됐고 남는 시간을 보다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게끔 인류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자아성취와 명예심을 느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단순한 암기력에 힘입어 남들보다 몇 문제를 더 맞혔다고, 이력서 빈칸을 조금 더 채울 수 있었다고 지금의 자리를 꿰차고 안주한다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이제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공헌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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