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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층층이 퇴적된 삶의 역사다
2018년 05월 02일 (수)
이덕진 7618700@kndaily.com
   
▲ 이덕진 문화학박사

 팰럼시스트(Palimpsestㆍ복기지)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양피지 위에 글자가 여러 겹 겹쳐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양피지에 글을 쓰던 시절에는 귀한 양피지를 재활용하기 위해서 이미 쓰여 있는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자를 써서 이전에 쓴 글자들 위로 새로이 쓴 글자가 중첩돼 보이는 일이 흔했다. 이런 뜻의 단어가 건축에서는 오래된 역사적 흔적이 현재의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은유적으로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인 로마는 펠럼시스트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로마는 과거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면서 완전히 버려진 도시가 됐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로마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테베레강의 범람에 의해서 6m가량의 퇴적층이 쌓여서 과거 유적들이 덮어졌고, 이후 꾸준히 인구가 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고대 로마의 도시 흔적이 다른 종류의 도시 공간으로 전이된 경우가 많다. 대표적 예가 과거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었던 곳이 퇴적된 흙으로 덮여 없어지고 그 모양만 남아서 지금의 나보나 광장이 된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없어지고 바로크 시대에 베르니니에 의해서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광장으로 바뀌었지만, 말굽 모양으로 돼 있는 특이한 나보나 광장의 형태는 과거 로마 시대의 경기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역사가 깊은 도시들은 마치 여러 장의 트레이싱페이퍼(투사지) 그림들이 쌓여 있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도시 디자인은 쌓여 있는 여러 장의 트레이싱페이퍼 그림들을 한 장씩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어느 부분은 지우고 어느 부분은 살리면서 상호관계를 조절해 오늘의 이야기를 하는 그림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심은 한 도시의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중심지이며 수많은 삶의 흔적과 역사를 담고 있는 장소이다. 또한 도심에는 다양한 활동이 집중되기 때문에 도시의 성장에 발맞춰 그 역할이 계속 변하고 발전하는 동시에 변화에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는 도심쇠퇴와 공동화와 같은 도시문제가 집중되는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도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도심재생은 도심부의 물리적 환경개선이나 경제적 재활성화 이외에도, 도시 정체성의 제고, 도심 상주인구의 확보가 필요하며 위험주택의 철거와 신규 주택 건설을 중심으로 한 도심재개발에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중시하는 도심재생으로 변해야 한다. 도심재생 또한 지역의 고유한 맥락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생되는 지역의 특성과 재생의 자원이 된 근대역사 경관의 특성을 이해하고 학습해야 한다.

 이처럼 도시의 역사적 상징성을 이용하는 도심재생을 이끈 것은 옛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Nostalgia)이다. 개발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래 건축이 가지고 있는 낡은 느낌이며, ‘옛것을 옛것처럼 고치는 것’이 핵심이다. 노스탤지어를 통해 만들어진 근대 시기에 대한 이미지가 지역의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적 활동으로, 나아가 지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문화적 활동이 돼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위험한 불량주택을 선정해 철거 후 신축하던 도심재개발 전략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건축을 선정하고 그것의 이용과 개발을 추진하는 도심재생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도심재생에서 역사 경관의 보호와 개발은 대립적인 말이 아니라 서로 결합적으로 작동하며, 근대역사 경관과 그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주요 자원으로 사용돼야 한다.

 ‘현재’ 가 연속해서 흐르는 시간이자 단편이라면 도시 공간에는 반드시 ‘과거’ 그 자체인 역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직관적으로 역사라는 옷을 입은 매력적인 도시 공간이 특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 이전에는 현재였던 과거에 어차피 언젠가는 현재가 될 미래를 겨냥하고 정성을 다해 도시 공간을 만들어 왔다. 리노베이션이나 컨버전 등 건축물 자체를 재화로써 활용하는 수법, 건축물뿐만 아니라 도시의 ‘공간구조’를 계승하는 도시 전략적 수법, 혹은 도시에 만연해 있는 일부의 병소(病巢)를 없애는 일이 지역 전체의 역사적 환경보전이 된다고 하는 역설적인 수법도 있다. 더욱이 역사적 사료가 풍부하지 않은 곳이더라도 건물 자체는 갱신하면서도 도시 공간의 의도와 리듬을 계승하는 수법이나 적은 역사적 사료를 중심으로 하면서 역사적인 공기를 새롭게 불어 넣는 수법도 시도되고 있다. 도시의 기억은 지층처럼 축적된 과거의 단면을 투과하면서 시대를 넘어서 쌓여간다. 이런 축척을 단절하는 벽을 만들지 않도록 현재의 도시 공간도 차곡차곡 쌓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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