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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서 ‘아라가야 왕성’ 흔적 발견
함안서 ‘아라가야 왕성’ 흔적 발견
  • 박재근ㆍ음옥배 기자
  • 승인 2018.06.0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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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서 발견된 아라가야 왕성 흔적.

1천500년 전 추정

대규모 성곽 등 확인

 대가야ㆍ금관가야와 함께 가야 중심세력을 형성했고 신라ㆍ백제ㆍ왜와 교류했다는 고대 국가인 아라가야(阿羅加耶) 왕성의 실체를 드러낼 유적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아라가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에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야가야’(阿耶伽耶), ‘안라’(安羅)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하나 자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사료 연구로는 한계가 뚜렷한 상황에서 아라가야의 토목기술과 방어체계, 생활문화를 구명할 획기적 고고학 자료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7일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그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아라가야 왕궁터로 지목된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서 진행한 발굴조사 성과를 발표하면서 “아라가야 왕성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조사 지역 일대가 왕궁터로 알려진 만큼 중장기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날 설명회에서는 5∼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5m, 폭 20∼40m인 성벽과 성벽 위에서 확인된 2열 나무기둥, 건물터, 구덩이 유구(遺構ㆍ건물의 자취)가 공개됐다.

 성벽은 나뭇가지나 잎을 올리고 태운 목탄층을 만들고, 그 위에 차곡차곡 흙을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사용해 공들여 축조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연구소 측은 지금까지 가야 권역에서 조사된 토성 높이가 2∼4m였고, 성벽 축조 과정에서 목탄층이 드러난 사례가 처음이라는 점에서 아라가야 왕성 실체를 드러낼 실마리를 찾았다고 역설했다. 게다가 아라가야 권역에서는 말이산 고분군 같은 무덤만 조사된 상황에서 생활유적을 발견한 이번 발굴은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넓은 성벽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기둥 열이 나왔고, 구덩이 유구 안에서는 인근 말이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사한 통형기대(筒形器臺ㆍ원통모양 그릇받침)를 비롯한 각종 토기가 출토됐다.

 조사단은 이번에 확인한 토성 유적에 대해 가야 권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축조기법이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강조했다.

 토성 높이는 8.5m이고, 상부 폭은 20∼40m에 이른다. 토성은 구릉을 따라 축조해 최대 높이는 10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구역에서 드러난 토성 길이는 약 40m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동시기 가야 토성으로는 높이가 약 4m인 합천 성산토성, 양산 순지리토성과 높이 2.8m인 김해 봉황토성이 있다”며 “다른 가야 토성보다는 확실히 크다”고 강조했다. 흙으로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나무기둥을 설치하고, 차곡차곡 흙을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풍납토성 높이가 13.3m이고, 몽촌토성 높이가 6m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야리 토성도 왕성급 유적이라는 것이 연구소 설명이다.

 강 연구관은 “성벽을 단단히 쌓기 위해 나뭇가지나 잎을 올리고 태운 목탄층을 조성했다”며 “국내 토성에서 나뭇가지로 층을 만드는 부엽층은 확인된 바가 있으나, 목탄층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토성 성벽 위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으로 짐작되는 2열 나무기둥과 함께 건물터, 구덩이 유구(遺構ㆍ건물의 자취)가 발견됐다. 목책 나무기둥 구멍은 직경이 약 30㎝이며, 나무기둥 사이 간격은 1m다. 좌우 나무기둥 열의 폭은 2m다.

 강동석 연구관은 건물터에 대해 “바닥이 지면보다 높은 고상(高床)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기둥 구멍 배열이 불규칙적이어서 정확한 건물 형태와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성내에서 확인된 유적 가운데 이목을 끄는 것은 기반암을 인위적으로 파서 만든 가로 5.2m, 세로 3.4m, 높이 0.5m 구덩이다.

 이외에도 아라가야가 봉분을 높게 만든 무덤인 고총(高塚)을 조성하고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한 전성기인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에 제작한 토기 조각들이 나왔다. 조사 지역은 1587년 편찬한 조선시대 읍지 ‘함주지’(咸州誌)와 일제 대 고적조사보고에 아라가야 왕궁 추정지로 기록됐고, ‘남문외고분군’, ‘선왕고분군’, ‘신읍’(臣邑)과 같은 지명이 전하는 곳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에 나온 토성은 아라가야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며 “그동안 아라가야 유적 발굴은 고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왕성 유적이 나오면서 최고지배층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토성 상부는 이달 말까지 추가로 조사할 것”이라며 “조사 범위를 넓히면 왕성 규모를 파악하고 더 좋은 유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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