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7:30 (금)
책과 함께 하는 피서
책과 함께 하는 피서
  • 이광수 소설가
  • 승인 2018.07.19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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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소설가

   하지가 엊그젠가 싶더니 벌써 소서와 초복을 지나 대서(23일), 중복(27일)이 가까워 졌다. 연일 35도를 웃도는 폭염으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잠시 볼일이 있어 나들이를 할 땐 따가운 햇볕과 높은 습도로 땀이 줄줄 흐른다. 더위를 싫어하는 체질이라 여름은 지옥과 같다. 형편만 된다면 여름 한 철 북극권에 있는 나라에 피서를 떠나고 싶다.

  열사병이 겁나 방안에 틀어박혀 에어컨 바람으로 피서를 하자니 고역이다. 손자가 수족구 증세가 있어 어린이 집에 보내지 못해 내가 며칠간 돌보았다. 삼시 세끼도 해먹이고 말벗도 돼줘야 하기에 반갑지 않았지만 맞벌이 하는 자식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참에 동화책도 읽어주면서 3세와의 커뮤니케이션을 꿈꿨다. 그러나 제 애비가 출근 시 데려다 주고나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이 컴퓨터 앞이다. 게임 비슷한 어린이 프로를 보기위해서다. 컴퓨터가 있는 방은 에어컨이 없어 오전에 선풍기를 켜주기 때문에 한낮이 되면 더워 에어컨이 있는 안방으로 오라한다. 그런데 오자마자 TV를 켠다.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프로이다. 며칠 데리고 있는데 손자와의 대화는 밥 먹을 때 잠시 하는 것뿐이다. 그림책도 안보고 그림도 안 그린다. 글쓰기 공부(아직 5세라 어리지만)도 안한다. 제 누나 초등 1년생 손녀가 2주에 한번 들릴 때도 마찬가지다. 참 걱정스럽다. 맞벌이 하는 부모들이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 학원에 보내는 이유를 알만하다.

  집에 와서 하는 것은 학생의 경우 숙제를 하는 정도이다. 물론 활자매체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진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겠지만 종이책으로 보고 읽으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컴퓨터 화면이나 TV화면을 통해서 보는 것에는 차이가 많다. 온라인은 깊이 생각할 틈과 반복해서 읽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순간적이고 스쳐지나가 깊이 생각하는 사고력의 결핍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요즘 신세대들은 생각의 깊이가 모자라 인내심이 없고 즉흥적으로 행동한다.

  희로애락의 감정표현이 즉흥적이고 제 맘에 들지 않거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엔 아예 귀를 닫고 산다. 잔소리하는 어른들을 꼰대라고 비꼬면서 멀리한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주변에 자식에 대한 관심이 큰 부모들의 애기를 들어보면 거실에 있는 TV를 안방으로 옮기고 애들 방엔 컴퓨터만 둔다고 했다. 그리고 컴퓨터 보는 것도 감시한다고 한다. 컴퓨터게임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초등학생만 돼도 스마트 폰을 사주니 이 또한 통제 불능이다. 스마트폰의 기능이 컴퓨터를 능가할 정도로 발전해 속수무책이다.

   IT기기는 강한 중독성이 있다. 책은 눈이 피로하거나 지치면 책장만 덮으면 잠시 쉴 틈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한 느낌이 가슴에 잔상으로 남아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 등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게임의 법칙은 지기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어 반복하게 한다. 거기에 광고라는 돈벌이 수단을 끼워 넣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그런 부작용에 대한 죄의식도 없다.

  허무맹랑한 스토리로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 속에 살게 한다. 물론 만화책도 그런 점에선 비슷하지만 오프라인에서 보는 만화는 온라인 게임과는 느낌 자체가 다르다.

  하기야 요즘 만화책도 성인 애로물을 뺨칠 정도의 야한 내용으로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옛날에도 그랬는데 큰 부작용은 없었다. 나의 경우 만화도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읽지 않았다. 위인전기나 세계명작들을 사거나 빌려서 거의 다 읽었다.

  그 당시 번역이 다소 미비했지만 그런 경험들이 축적돼 글을 쓰는 동기가 된 것 같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며 인간의 지은 죄에 대한 참회를 느꼈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인간의 이중적 사고나 관습에 의해 사랑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빅토르 유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란 무엇이며,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의 거짓 사랑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처럼 밤을 꼬박 새우면서 300쪽이 넘는 명작들을 읽고 나면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했다. 아마 지금 어린이들 보고 300쪽이 넘는 소설책을 읽어 보라고 하면 다 읽는 애들은 10%도 안 될 것이다. 재미없고 시시하며 덜 자극적이라고. 애들이 그런데 어른들이야 말해 무엇 하랴. 1년에 책 한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57%나 된다는 통계수치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책을 안보니 생각이 없고 감정을 앞세워 핏발선 눈으로 싸움질만 한다. 사람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는 살벌한 세상이 됐다. 오직 돈에만 눈이 멀어 죽을 때까지 돈타령만 하다가 사라진다. 물질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돈은 현대인의 삶에 필요조건이다. 다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종이책을 가까이 하는 세상이 돼야 우리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지식강국, 경제강국, 복지강국이 될 것이다. 복더위에 나들이를 삼가는 대신 에어컨 밑에서 명작의 세계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좋은 피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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