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3:17 (금)
8월 태양 닮은 선홍 진사 '달을 품다'
8월 태양 닮은 선홍 진사 '달을 품다'
  • 박경애 기자
  • 승인 2018.08.05 17: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천도예원 이한길 “꿈꾸면 이루어진다”

큰 길 꿈꾸며 한 길 걷는 경남 최고 명장
당초무늬 그릇 20벌, 사준 첫 손님 고마움

 

▲ 지난 2011년 경상남도 도자기부문 최고장인에 선정된 진례면 진례로 337-3 길천도예원의 이한길 명장.

 

김해 도자(도기와 자기)는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그만큼 김해엔 도예장인들이 많다. 더불어 엄격한 형식과 작가의 감각이 수많은 고행의 손잡음 끝에 나오는 소산물이 도자인 만큼 김해 도예인들의 자부심과 명성 또한 대단하다. 여기다 전국 최초로 생긴 분청도자관과 건축도자박물관인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이 있어 김해는 단연 독보적 지역성을 지닌다.

이러한 김해에서 30여 년간 꾸준히 자신만의 도자를 만들어오다 지난 2011년 경남상도 도자기부문 최고장인에 선정된 작가가 있다. 바로 진례면 진례로 337-3 길천도예원의 이한길 명장.

길천도예원 입구는 여느 일반 가정집과 닮았다. 하지만 집을 둘러싼 주변 벽이 이곳이 공방임을 알려 준다. 마치 그림처럼 장식돼 있는 많은 그릇들의 오브제가 긴 벽을 메우며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끈다.

 

▲ 8월의 태양빛을 고스란히 닮은 '진사'가 전시돼있는 길천도예원 전시장.

 

이한길 작가의 대표 작품은 ‘달항아리 진사’다. 요즘은 '진사사과오브제'로 특허까지 받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8월의 태양빛을 고스란히 닮은 ‘진사’는 구리 안료를 통한 선홍빛 도자다. 진사의 강렬하고 화려한 붉은 빛은 고급스러움과 동시에 도자 스스로도 의기양양한 자태를 뽐내며 아주 당당한 기품을 보인다.

사전적 의미로는 붉은 색을 내는 안료나 유약을 사용해 만든 도자기를 통칭 진사자기라 부른다. ‘진사’의 명칭은 산지였던 중국 호남성에 있는 진주辰州에서 유래됐고 일본에 의해 이름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주점사기(朱點沙器) 또는 진홍사기(眞紅沙器)라 불렀다. 특히 진사자기는 12세기부터 한국에서 고려청자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중국의 원과 명대에 활발히 사용됐으며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 길천도예원 내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진사자기에서 보이는 붉은 색은 검은 색을 띠는 산화제2구리(CuO)가 가마에서 소성되는 중 산화1구리(Cu2O)로 변하면서 만들어진다. 소성이란 불때기를 말한다. 진사자기의 색의 변화는 가히 연금술로 읽힌다. 붉은 무늬는 섭씨 1300도가 넘는 고온의 가마 안에서 산소와 불이 작용해 유약이 피어나면서 생긴다.

이한길 작가에 의하면 진사는 유약 종류에도 많은 영향을 받지만 한마디로 ‘불의 결정체’다. 덧붙여 작가는 “재료도 중요하지만 똑같은 데이터로 작업해도 나올 때마다 다른 게 진사다”며 “가장 중요한 건 1천 300도 온도에서 유약의 색이 발색되는 과정이 진사의 이미지를 달라지게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불의 어느 정점에서 색이 바뀔 때 들어가는 산소의 공급량, 그러니까 가마로 들어가는 공기의 양이 진사의 모양을 결정한다”고 말하며 “특히 불꼬리(요변)에 산소량이 어떻게 가 닿는가에 따라 발색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이것이 제대로 안 될 경우 한 가마를 다 버릴 때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이한길 작가의 진사를 보면 제각각 얼굴이 다르다. 그러니까 작품 하나하나가 스스로 유일성을 획득해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작업하는 사람이니까 쉬는 것도 모르고 작업만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아내와 많이 다니려고 합니다”라고 이한길 작가는 필자와의 만남에서 첫 운을 뗀다. 한마디로 ‘많은 것을 보는’ 여행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거기서 많은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자연과 교감하기도 하면서 자신과의 대화를 즐긴다. 이렇게 전국의 각지를 돌며 많이 체험하고 감상한다. “꼭 도자기분야가 아니라도 아내와 많은 곳을 찾아다닌다”고 말하는 장인의 눈에서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차 있음이 보인다.

(전)김해도예협회의 회장과 각종 단체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이한길 명장은 현재 인제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 유약을 바르기 전 미리 구워둔 도자를 바라보고 있는 이한길 명장.

 

이한길 장인은 학생들과의 첫 수업에서 항상 당부한다. “최소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분기별이라도 꼭 미술관에 가라”고. 그에 의하면 그렇게 해서 20년이 지났을 때, 간 사람과 가지 않은 사람은 분명 차이가 난다. 그만큼 많은 것을 체험하고 감상했을 때 예술적 기량은 더 난이도가 높아져 있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는 늦은 나이에 아내와 함께 부산예술대학교에서 통합예술치료학을 전공했다. 작가의 아내는 응용미술을 전공한 인재로 도예·서예·회화·자수 등 못 하는 게 없을 정도로 재주꾼이다. 그녀는 현재 교육심리학 석사과정에 재학해 심리치료와 명리학을 함께 공부하고 있다. 그는 향후 그녀와 함께 상담과 흙이 접목된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합천이 고향인 이한길 장인은 우연한 기회에 목공예를 배워보고자 당시‘공예학교(한국조형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막연히 흙이 좋아 도자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도자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당장 꿈이 당장 없어도 괜찮다. 자신에게 크게 와 닿을 때 그때 시작하면 된다”고. 이한길 작가는 그만큼 자신의 소양과 꿈은 열심히 하는 와중에 생겨나고 뭔가 하고 싶을 때 그때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렵게 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입의 꿈을 접은 채 미술학원에서 진학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고 3때 이미 의대에서 해골을 빌려와 인체 전신상을 조각할 정도로 기능과 열정이 뛰어났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인체를 만지는 데 미쳤었다. 그래서 학교 졸업 후 처음 진례로 올 때도 양초를 통해 공예품을 만드는 회사 디자인 개발실에 입사했다. 그렇게 1년을 근무하다 당시 진례에 도자기 공방이 여럿 생겨나는 추세에 발맞춰 도자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제 당시 공방은 딱히 급여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라 식사만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아 1986년 식목일, 현재의 이름인 ‘길천도예원’으로 공방을 열었다. ‘길천’은 ‘한길’의 ‘길’과 작가 고향인 합천의 ‘천’을 따 만든 이름이다. 그는 돈을 벌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의 진례면사무소 주변에 조그마한 움막을 마련해 ‘내 것을 만들어보자’는 신념으로 도자기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가마가 없어 이웃 가마를 빌려 도자기를 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꿈이 있었다. 그는 20대에 자신의 공방과 자동차, 그리고 집을 갖고자 했다. 그러던 그가 스물아홉에 현재의 도예원을 짓게 됐다. 당시 친지에게 신뢰를 얻었던 그는 매형의 도움을 얻고 대출을 받아 집 안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이층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 곳이 집이었고 작업장이었다. 그때는 잠깐씩 이층에 마련된 살림집에서 잠만 자고 거의 작업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자신이 바라던 모든 것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는 항상 얘기한다. “꿈꾸면 이루어진다”고.

작가는 공방을 연 초반에 수반이나 밥그릇 등 생활자기를 만들어 꽃집이나 요리학원 등을 찾아 판매활로를 찾았다. 그런데 타고난 성격 탓에 말 한 마디 못 하고 팔고자 한 도기들을 그대로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작가에게 첫 손님에 대한 기억은 크다. 당초무늬 밥그릇 20벌, 20만원어치를 사 줬던 같은 동네에 살던 그 손님에 대한 고마움이다. 지금은 2억 원 어치를 팔아도 그만큼 기쁘지는 않겠다는 이한길 씨. 그 당시 그의 고달픔과 진지함이 보여 지는 대목이다.

특히 큰 아이 출산자금으로 마련해 둔 18만원을 이웃에게 빌려준 뒤 받지 못해 난감했던 상황을 작가는 떠올린다. 아내만 입원시킨 채 “현재 최선이 뭔가” 생각하다 밤새 작업만 하며 병원비를 마련했던 그때를 작가는 잊지 못한다.

작가에 의하면 88올림픽 이후 90년 즈음 도자기 시장이 좀 좋아졌다. 당시 플라스틱·스텐그릇의 유행에서 생활자기로 돌아선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산청까지 가 흙을 싣고 와 일일이 흙을 가공해 썼기 때문에 파손되는 양이 많았고, 그래서 도자기생산도 그리 많지 않아 그때의 생활도 그리 넉넉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지려 애썼다. 이 마음은 아직까지도 모토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발생하면 최선이 뭔가를 먼저 생각하고 일을 처리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자들에게도 항상 이 부분을 강조한다.

작가는 당시를 떠올리며 “그 때는 아무 계산 없이 작업만 했다. 나름 힘든 일을 하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왜 그런 생각을 안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 소회를 밝힌다.

 

▲ 스물 아홉에 이층집을 지은 이한길 명장은 당시 밤낮으로 작엄만 했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명예와 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60대가 되면 부를 좇기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작업만 하겠다고. 그래서 가족부양과 먹고사는 것에서 벗어나 진정 예술성 있는 작품을 해 보겠다고. 그러면서도 작가 자신의 자신감이 충만한 작품으로 소비자의 마음도 놓치지 않겠다고.

자칫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말로 들리는 작가의 60대 이후 꿈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만의 예술적 작품을 만들려면 가마 불을 마음껏 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경제적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이한길에 의하면 우리나라 도자기 소비자의 취향은 너무 빨리 바뀐다. 그는 “80년대 백자·청자 시장이 그후 인화문 전통기법의 분청시장이 되었다가 지금은 고백자스타일에서 컬러풀한 시장으로 넘어왔다”면서 도자 시장의 변천사를 열거한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첨단 시설을 갖추기 힘든 일반 공방은 대기업 도자시장과의 경쟁력에서 떨어진다. 그래서 '전통자기공방'은 하나의 문화로 봐 주어야 한다”며 현재 공방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현재 논의 중인 도예촌을 만들면 거기에는 연구소가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재료를 연구해주는 전문가가 있으면 그 재료를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현재 대기업과의 경쟁력에서 위축된 전통공방이 살아남을 방법은, 연구소를 통해 생산된 최고의 흙이 작가만의 색깔을 입고 독창적 작품으로 만들어지면 된다.

한편 이한길 장인은 “도자에서의 좋은 작품은 50~60대에 나온다. 현재 김해작가들의 작품이 좋은 것도 이 연령대가 많기 때문이다”며 “30여 년 간 왕성한 작업을 해 온 김해 도예인들은 현재 최고의 정점에서 작업할 수 있는 시기”라고 김해 도예의 발전적 상황을 설명했다. 아울러‘연륜에 맞는 문화예술 쪽의 작품가격책정’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매년 자신의 공방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도예체험행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김해농촌지도소 다도대학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1년 동안 강의 중이다. 2주에 5시간 이론 강좌를 하면서, 수강생들에게 "항상 김해 도자기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한다.

가끔씩 서민갑부가 나올 때면 자신과 닮아 있음을 본다는 이한길 작가.

그는 요즘 진사 중에서도 백자 대호항아리라 불리는 ‘달항아리’를 통해 ‘선홍 진사 달을 품다’라는 모티브를 작업하고 있다. 그는 특히 ‘따뜻한 선홍·기분 좋은 선홍 진사’에 주력한다.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통해 전국명장에 도전하고 있다는 이 작가에게 있어 “건강하게 오래 작업하는 게” 앞으로의 포부다.  ‘큰길을 꿈꾸며 한 길로 쭉 걸어온’ 경남의 최고 명장 이한길의 의지에 한 가닥 힘을 보태며 향후 그의 작업을 주목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