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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농부에게 잔인한 달
11월은 농부에게 잔인한 달
  • 박재근 기자
  • 승인 2014.11.23 2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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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 전무이사 박재근
 11월은 1년을 마무리하는 끝자락이다. 다음 주엔 12월, 두툼했든 달력도 달랑 1장만 남게 된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1월을 무척 좋아했다는 시인 나태주의 ‘십일월’이다. 낙엽 지는 계절인 11월, 이로 인해 조락(凋落)이나 스산함도 느끼게 하지만 수확이 끝난 농촌에서는 추수동장(秋收冬藏)의 느긋한 분위기에 젖는 상(上ㆍ음력 10월)달이다.

 또 11월은 변혁과 역동의 달이기도 하다. 1917년 11월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말에 일어난 혁명(1918년)이다. 반정부 운동은 1918년 가을, 11월에 무혈 혁명으로 교체됐고, 국내의 경우는 1893년 동학의 함성이 산천을 울렸다.

 하지만 우리의 농촌 들녘은 변혁은커녕 스산함이 감돌 정도로 텅 비었다. 농부의 가슴을 열어 보면 새까만 숯이 가득할 정도다. 풍년에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생산비, 운송유통비를 건지지 못하니 농산물을 갈아엎을 수밖에 없고, 흉년에는 내다 팔 농산물이 없으니 말이다.

 이 판에 고령화와 농촌 과소화가 심화하고 있고, 소득과 생활여건 등 도농 간 격차는 커지고 있다. 또 우리와 인접하고 농업생산구조가 비슷한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도 타결돼 녹록지 않은 절체절명의 위기임이 틀림없다. 정부는 한중 FTA의 보완대책을 수립, 농수축산업 분야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준비한다지만, 발효된 국가의 FTA에 대한 대책은 전무하다는 게 농어촌 현장의 목소리다. 또 내년부터는 우리 농업의 보루인 쌀마저 개방의 문이 활짝 열린다. 지난 2005년 세계무역기구(WTO)와 체결한 쌀 관세유예가 올해로 완료되기 때문이다.

 쌀은 재배 면적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위면적(10a)당 생산량은 전년 대비 7.8% 증가, 풍년가를 부를만하다. 지난여름 농민들을 그만큼 더 뜨거운 땀방울을 흘렸음이 분명하다. 그 땀방울에 보답하는 추수감사제 같은 축제를 열어줘야 할 판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정부관사 앞에 야적된 가마니들은 더욱 높이 쌓였고, 농민들의 태도도 예년과는 다르게 예사롭지 않다. 정부는 쌀 개방에 대비해 높은 관세율을 적용, 국내 쌀시장의 안정을 꾀하겠다지만 농민들은 볼멘소리다. 과수는 풍년의 저주로 처리난을 겪고 있다. 사과, 배, 감 등 모두가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을 정도다. 노란 속이 꽉 찬 김장용 배추들이 산지에서 갈아엎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가을 일조량도 높았고 태풍도 지나가지 않은 덕분에 배추가 대풍년(大豊年)인 때문이라지만 탓으로 돌려는 것은 옳지 않다.

 38년 만에 찾아온 수확 전 추석이라 소비가 준 것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농수산물이 제값을 받도록 유통구조를 바꾸겠다고 한 게 족히 30년은 넘은 것 같다. 또 운 좋게 값비싼 시세인 농작물이 있어 오랜만에 비싸게 팔려고 하면 정부의 물가안정정책에 따라 수입 농산물이 물밀 듯 들어온다. 물론 날씨에 민감한 농산물은 작황이 들쑥날쑥할 수 있지만 선진농업으로 가는 길목에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농업이란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和)이라는 3재(三才)가 어울려 농업의 도를 일군다는 다산 정약용, 그는 갔어도 그의 정신은 살아있다.

 농업은 태생적으로 세 가지 불리점(不利点)이 있어 3농(三農)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첫째가 농사란 장사보다 이익이 적으니, 정부가 각종정책을 베풀어 수지맞는 농사가 되도록 해줘야 하며, 둘째는, 농업이란 원래 공업에 비해 농사짓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 경지정리, 관개수리, 기계화를 통해 농사를 편히 지을 수 있도록 하고 셋째는, 농민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상농(上農) 정책이다.

 하지만 어디 벼랑에 몰린 게 농업뿐인가. 각종 산업의 침체, 자영업의 줄도산, 청년실업 등 각 분야에 걸친 불경기에 경기는 바닥을 맴돌고 겨울나기를 걱정하는 서민들의 고민도 깊다.

 그 여파로 민심 또한 삶에 지쳐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한 치 양보 없는 극한 대립인 가운데 편협만 논리만 난무하고 오히려 더 거세지고 있다. 어디에도 ‘11월’이 주는 따스한 감성은 보이지 않고 흔들리는 민심은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11월은 한 해 결산을 준비하라고 12월이 남아 있지 않은가. 공무원 연금, 무상급식 등 진영논리에 막힌 매듭을 풀고 새롭게 도약하는 통섭(統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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