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4:24 (금)
애처롭고 처량하게 들리는 ‘모란동백’
애처롭고 처량하게 들리는 ‘모란동백’
  • 박태홍
  • 승인 2016.06.27 22: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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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홍 본사 회장
조영남 그는 누구인가?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미국의 명문 신학대학을 나온 우리나라의 인기 있는 대중가수다.

 연예계에서 반세기를 활동했으니 우리나라 사람치곤 조영남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라디오에서 TV에서 또는 신문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1945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72세다. 그래도 나이와는 상관없이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통기타와 청바지가 한창 유행하던 1972년 그는 ‘딜라일라’라는 번안곡을 불러 크게 히트시키면서 대중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예계 활동은 거침이 없다. 특히 노래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복부에서 끌어올린 그의 음색은 어느 성악가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 무대를 장학하는 그의 카리스마 또한 관중을 열광시키고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어떻게 보면 서정적이면서 낭만을 가미한 인격인데도 어디로 튈지 모를 럭비공처럼 자유분방함을 지니고 있는 요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이 같은 연유 때문인지 항상 관중들을 몰고 다니는 인기스타임에도 틀림이 없다. 각 분야에서 활동량이 많은 만큼 수상경력도 다양하다.

 한국방송대상 가수상을 받았고 인간상록수 표창도 수상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 연예계의 걸출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언제부터인가 그림 그리기에 심취했으며 그 바쁜 일정을 쪼개었다. 화폭에 담긴 그의 그림 또한 어디로 튈지 모를 흐트러진 모습과 연상되는 화투짝이었다. 정물화도 산수화도 아닌 화투짝 그냥 그대로였다.

 채색도 화투짝 색깔 그대로다.

 이때부터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발상 자체의 찬사를 보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켜 작품화하는 것에 대한 그의 열정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역시 조영남답다’라는 평판이 쏟아졌다.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화투짝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도 그렇고 삐딱한 자세로 덜렁대기만 했던 그가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을 나이프로 찍어 바르거나 붓으로 덧칠하는 섬세한 수작업을 해왔다는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한 것이리라.

 그의 화투짝 작품은 보기에도 그럴듯했다.

 낭만, 자유, 괴짜 아나키스트였던 조영남의 작품이기에 호당 가격도 만만찮았다. 그의 작품은 미대를 나오고 수십 년 그 계통에서 활동한 중견 작가의 작품가격을 상회하는 가격에 팔려 나갔다.

 방송활동에서의 몸값보다 더한 그림값이 형성된 것이다. 그는 방송의 울타리 안에 갇힌 방송 자체를 거부한 자유인이었다. 그러면서도 편집 때 잘려나갈 선을 넘지 않는 나름대로의 혜안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신문에 게재됐던 칼럼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또한 타 작가들이 상상하지 못한 자기만의 서체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묘한 아니면 엉뚱한 줄거리 자체가 그를 유명 칼럼니스트로 만든 것이다. 그런 그가 그림 대작사건의 주체가 돼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가 지닌 인기만큼이나 이 사건에 대한 전말도 일파만파다. 미술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또 그를 심하게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미술계의 대작 관행은 예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영남의 대작은 도를 넘었다는 게 미술계의 판단이고 해석이다. 검찰의 조사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시대는 이제 은막의 뒤켠으로 사라지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일로 공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관객과 함께할 수 있는 그의 시대는 지났나 보다.

 가수로서 또는 MC로서 그리고 칼럼니스트로서의 윤리의식이 결여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가 무대에서나 또는 칼럼에서 밝힌 자유인 또는 아니키스트가 진정한 것이었다면 그가 대작의 대가로 지불한 장당 10만 원의 가격 또한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 10만 원보다는 몇 곱절 더 많았어야 했다.

 평소 무소유를 주장했던 그가 무엇 때문에 분배의 원칙에서 벗어난 탐욕의 일탈로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를 내팽개치듯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해온 아니키스트 비슷한 주장은 가식이기 이전에 거짓이었다.

 그는 평소 습관처럼 “빈몸으로 왔으니 빈몸으로 가겠다”고 되뇌이곤 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떠난 뒤에 불러 달라며 남긴 곡 ‘모란동백’이 오늘따라 유난스레 애처롭게, 처량하게 들리는 까닭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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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9 00:32:58
작품 판매가격 1.8억에 갤러리에서 50% 가져갈테고 9천에서 300점 제작이면 3천만원이면 조금 준건가? 예술분야에서 공정한 조수의 보수가 얼마인가? 이런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비난을 하던지 해야 하는거 아닌가? 장당 10만원이 많은건지 적은건지...시간당 얼마를 준건지.. 객관적이 근거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