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20:39 (금)
漢江橋(한강교)
漢江橋(한강교)
  • 송종복
  • 승인 2016.08.10 21: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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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漢:한 - 한수 江:강 - 강 橋:교 - 다리

 한강의 다리는 33개이다. 다리명은 세운순대로 명명한다. 일제 때 첫째 한강대교, 둘째 양화대교, 셋째 광진대교이다. 4번째 세운 한남대교를 왜 제3한강교라 했는지.

 지난 1979년도에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 노래가 대중의 심금을 울린 적이 있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중략) /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바다로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만 갑니다’라는 노래와 같이, 서로가 만나면 다짐하고 맹세하던 곳이 이 다리이다. 아울러 이에 뒤틀리면 자살을 하기에 ‘자살다리’라고도 했다.

 한강교 명칭은 세운 순서대로 제1한강교(한강대교), 제2한강교(양화대교)이다. 따라서 1936년에 준공된 광진교가 제3한강교가 돼야 하는데, 1969년 12월에 4번째 개통된 한남대교를 제3한강교라 불렸다. 이의 잘못을 알았는지, 1985년 한강종합개발공사를 하면서 교량 명칭을 정리할 때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한강에는 33개가 있는데, 그럼 ‘제3한강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한강은 우리나라 삼천리강토를 양분하는 물길이며 군사적 용어로 강 이북은 전방이라 하고, 강 이남은 후방이라고 한다. 또한 한강은 민족의 애환을 싣고 있다. 이 강을 먼저 획득한 민족이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는 속설에 한강을 두고 동족끼리 치열한 전쟁도 많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오후에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적의 전면 공격은 아닌 것 같다’고 보고했다. 26일 남침이 확실함을 알게 되자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는 물론 평양 점령도 가능하다’고 호언했다. 다음날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열차로 대구로 빠져나갔다. 28일 오후에는 육군 공병대가 한강대교를 폭파시켰다.

 이 과정에서 다리 위를 있던 피난민 800여 명이 폭파로 목숨을 잃거나 한강에 수장됐다. 그리고도 라디오에서는 계속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시민의 피난 행렬을 묶어둔 채 앵무새처럼 녹음 방송만 틀어댔다. 어처구니가 없던 짓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강변을 따라 33개의 다리들은 열차전용도가 있고, 자동차전용도가 있고, 또 사람과 자동차의 공용도로가 있다. 이 ‘한강의 기적’을 증명하는 다리 아래로 우리의 근현대사가 흘러갔고, 또 흐르고 있다. 종래에는 나룻배로 의존하던 것을 1917년부터 도보로 건너게 됐다. 지금은 자동차도 건너기 힘겨운 다리에, 제3한강교를 찾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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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026 2023-08-29 15:33:28
광진교가 양화대교보다 먼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