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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황희
2016년 10월 17일 (월)
박태홍 7618700@kndaily.com
   
▲ 박태홍 본사 회장
 지금 이 나라의 정치는 겉돌고 있다. 정부, 여당, 야당 모두 그렇다. 무엇 하나 한목소리를 내는 게 없다. 근로자들의 추투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이들의 요구조건에 합의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현대차 노조만 겨우 합의를 이뤄냈을 뿐 그것도 막대한 기업과 국가손실을 본 후에 노사 간 타협이 이뤄진 것이다.

 국정감사에서도 변죽만 울릴 뿐 뚜렷한 무엇 하나 건져내지 못하고 있다. 여야 증인채택에 따른 입씨름만 계속할 뿐 행정의 독주를 견제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원래 어느 집단에서라도 다수의 소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흐트러진 다수의 의견을 모아 결론을 얻어내면서 그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것이다.

 근데 이 나라의 정체는 알 길이 없는 듯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전제국이 아닌 삼권분립에 의한 입헌국인데도 그렇지 못하다. 정부의 정강정책이나 모든 사회상에서 법대로 처리하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근데 이 나라는 법 이전에 이념이 앞서가는 듯한 형국이다. 시위현장에서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300여 일간 의식불명인 상태로 있다 숨진 백남기 씨 사망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부당국은 백씨를 불법집회의 폭력시위자로 간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반면 이 나라의 노동운동가와 일부 지식인들은 국가폭력에 의해 숨진 위대한 농민운동가로 숭상하고 있다.

 이 또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길 없듯이 우리들 또한 정답은 찾을 수 없다. 숨진 백씨는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었는데 이를 제지한 경찰 또한 직무와 관련한 수칙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불법집회의 폭력시위라 할지라도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국민이 숨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의 등을 한차례 때린 교사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고 재발 방지를 위한 인권교육을 받아야 하는 나라로 변했다.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를 때려서라도 사람 만들어 달라고 선생님에게 간청까지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오늘날의 교육현실이고 이 나라의 양극현상이다. 이 또한 어느 쪽이 합리적 이상주의자인지를 알 길이 없게 됐다.

 세상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하다. 이런 세태를 이끌어 가야 할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시대적 배경은 다를지라도, 사람 사는 세상의 기본은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같은 것 아닌가.

 조선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도전은 새 시대를 꿈꾸며 조선을 새롭게 설계한 무소불능의 천재였다.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제도를 바꾸고 군사력을 확충하기 위해 오행진출기도, 강무도 등의 병서를 지어 민초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문덕곡, 수보록, 몽금척 등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악곡을 지어 후세사람들로 하여금 교훈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국가제도와 운영의 근본이 되는 조선경국전을 지었는데 이것은 훗날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 외 역사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고려국사 37권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지방행정의 방법을 기술한 감사요약을 만들어 지방행정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중앙관료들을 위한 경제문감도 집필했다. 그 외에도 조선과 백성을 위한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윤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정도전의 개혁적 정치이상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에 반해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 4명의 왕을 섬기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일컬어지던 영의정에 오른 황희는 진보성향의 진정한 공직자였다. 황희는 공적인 일에는 엄격하기 짝이 없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온후하고 자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태종(이방원)의 왕후 민씨의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을 상소로서 제거한 사건이다. 황희의 원칙에 입각한 충실한 업무자세에 의해 태종은 처남들을 삭탈관직시켜 귀양까지 보내고 이어서 사사까지 시킨다.

 한마디로 말하면 황희는 공직자의 본보기이며 청빈의 대명사였다. 황희는 영의정시절에도 장판대신 멍석을 깔고 생활했으며 대부분의 녹봉을 민생규휼에 사용했다고 한다.

 정도전(1342년생)과 황희(1363년생)는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개혁성향의 정도전과 진보성향의 황희를 지금 우리들은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과 황희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사료에 의한 정도전은 뛰어난 개혁성향의 관리였다. 결국에는 정적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조선 개국의 공신임에는 틀림이 없고 황희 또한 보수성향의 명재상임에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같은 시대에 두 사람이 함께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를 우리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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