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분노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 중 하나다. 각종 사회적 범죄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돼 늘 경계의 대상이었고, 조절의 대상이었다. 급기야 분노를 ‘악의 축’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정당한 분노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마치 ‘아미그달라(amygdala)’가 손상된 사람처럼 우리는 그렇게 지내왔다. ‘아미그달라’는 분노나 공포 같은 부정적 감정과 관련된 뇌 속의 편도체를 말한다. 한 실험에서 아미그달라가 다친 원숭이를 야생에 풀었더니 단시간 내에 맹수에 모두 잡아 먹혔다고 할 정도로 생존문제와 직결되는 부위이다. 부정적 감정을 관장하는 아미그달라의 손상은 곧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대로 분노조차 못하게 스스로 감정의 족쇄를 채우고 살아왔던 것 같다. 제 때 분노하지 못해 가슴에는 응어리진 ‘화병’이 생겼고, 제대로 분노하지 않아 세상은 곪아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리고 하나씩 바로 잡아 나가려는 어떤 힘이 작동했다. 가슴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떨리고, 벅차올라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지경이다. 숨죽이고 있던 어떤 기운이 작동한 것 같다. 플라톤이 말한 ‘티모스(thymos)’가 되살아난 덕분일까. 플라톤은 사람의 영혼은 욕망, 이성(로고스), 티모스(기개ㆍ용기)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티모스’야 말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고, 삶에 대한 열정과 용기라고 봤다. 자신을 지키고, 동료를 지키고, 조직을 지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적과 전투를 벌이며 폴리스를 지키려는 정당한 분노를 ‘티모스’라 불렀다. 실제로 사람의 가슴 한 가운데, 갈비뼈 사이에 나비처럼 생긴 흉선(胸線ㆍthymus)이라는 면역계통의 기관이 있다고 한다. 사춘기 때 30~40g 정도 커졌다가 자라면서 점점 줄어들어 70대가 되면 6g까지 줄어든다고 한다. 크기에 비례해서 그 기능도 줄어드는데, 질병을 방어해 주는 중요한 면역기관이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 생명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학자들은 ‘티모스’라 명명했다고 한다. ‘티모스’의 활동은 살아있음의 증표다. 욕망과 이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 실존의 가치를 결정짓는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있다면 바로 ‘티모스’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거리로 나섰고, 세상을 바로잡으려 외치고 있는 것이다. 시민혁명이 축제형식으로 진행되면서 한국 시민의 위대함이 드러나고 있다는 일부의 주장에 동의하고 싶다.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 몰리면서 각자도생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보여줬던 개인의 정체성이 광장에서 ‘동질성’이 아닌 수백만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표현되면서 큰 단합, 대동단결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국민들은 ‘아미그달라’가 손상된 채 이리 저리 내 몰리는 ‘개 돼지’가 아니다. 당당하게 분노하고, 불의에 항거하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티모스’가 활활 타오르는 가슴 뜨거운 국민이다. 이 점을 유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