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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세례
햇빛 세례
  • 이주옥
  • 승인 2017.04.04 2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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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오전 11시다. 봄 햇살이 눈 부시다. 세탁기 마지막 헹굼 코스를 도는 빨래들도 한껏 용트림 중이다. 이제 탈수를 마치면 탈탈 털어 구김을 펴고 건조대에 펼쳐 널 것이다. 햇살 한 줌에 뽀송뽀송하게 말려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개운해진다. 4계절 조금씩 다른 각도와 강도로 비치는 햇빛으로 인해 곡식이 익고 과실의 단맛을 더한다.

 식물에도 그렇지만 사람에게도 햇빛은 절실히 필요한 영양분이다. 마음이 울적한 사람이나 기운이 없는 사람에게 햇빛은 묘약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공기나 햇빛은 그냥 당연히 우리 곁에 있는 것이라 여겨 사뭇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며 영양학적으로나 생물학적인 비타민D의 중요한 가치를 간과하고 만다.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중요한 ‘햇빛’을 쐴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업무와 학업 등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또한 어쩌다 햇빛을 쐰다고 해도 피부 건강을 염려해 자외선차단제를 바르고 양산이나 팔토시 등으로 가리기 일쑤니 제대로 영양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 정서상 하얀 피부를 선호하다 보니 햇빛 노출을 꺼릴 뿐만 아니라, 성인일수록 비타민D가 풍부한 유제품류를 먹지 않아 비타민D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지난 2010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93%가 혈중 비타민D 결핍 상태로 나타났다고 한다. 천연으로 얻을 수 있는 공짜 영양제를 거부하고 물리치는 일이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비타민D는 햇빛을 통해 간과 신장에서 만들어지는 인체 필수 호르몬이다. 부족할 경우 뼈가 약해지고 치매, 우울증, 심혈관 질환 등에 걸리기 쉽다. 따라서 봄철부터 적극적으로 햇빛을 쐐서 체내 비타민D를 합성시키는 게 좋다고 한다.

 비타민D 전문가인 마이클 홀릭 박사에 의하면 위도가 35-38 사이인 우리나라에서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있는 기간은 4월부터 11월까지라고 한다. 햇빛 합성에 적당한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이며 햇빛에 노출됐을 때 피부색이 분홍색으로 변할 때까지의 시간을 확인해서 햇빛을 쐐야 한다고 말한다.

 꽃놀이나 등산으로 산과 들엔 사람 천지인 계절이다. 상쾌한 바람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이다. 그런데 햇빛은 그런 행복을 반감시키는 불청객이 될지도 몰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세상 만물을 성장시키고 단단히 여물게 하는 데 햇빛만큼 크고 소중한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어느 시인은 과일의 마지막 단맛을 들이기 위해 마지막 햇살의 간절함을 기도했다. 여든 넘은 할머니의 마루 끝 해바라기는 노년의 우울한 마음을 개운하게 해주는 제습의 시간이다. 간밤 칭얼거리던 아가의 진땀이 배인 이불도 맑은 햇살에 꼬들꼬들 말라간다. 나 또한 눅진한 몸을 이끌고 햇살 반짝이는 공원벤치에라도 앉아있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엄마와 산책 나온 아이들의 키도 한 뼘씩 자라날 것 같다.

 봄볕에 며느리 내 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는 속담이 있다. 분명 볕이 좋긴 하나 봄볕은 자외선이 유독 강해서 피부가 상할 수 있어 딸보다는 며느리에게 쏘게 한다는 고부 관계에 빗댄 옛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밭일에 시달리는 우리네 부모 세대에 햇빛은 감사함보다는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하는 고약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햇빛 때문에 암이나 각종 질병에 걸리는 일이 드물었는지 모른다. 늘 몸을 내놓고 직접 햇빛을 쏘는 일이 많았기에 피부가 희거나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강단 있는 건강함을 유지 했을 터, 지금처럼 희멀건 몸으로 비타민을 비롯한 영양제로 기력을 보강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롭고 실속 있는 천연 영양제 섭취가 아니었을까. 바람 살랑이고 꽃들이 만발하는 즈음이다. 쏟아지는 햇살로 온몸 가득 세례받으며 몸과 마음도 건강하게 격정의 한 시절을 충만한 온유함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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