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탐욕의 그물에 매달려 살면서 그것이 탐욕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탐욕의 그물을 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물을 더 탄탄하게 동여매고자 배운 지식(knowledge)을 다 쏟아붓고 그 지식을 이용해 부(富: wealthy)를 축적하는 수단과 방법에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탐욕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하게 배척하는 것은 지식이다. 그런데도 지식을 오히려 탐욕의 편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지식을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마음속 탐욕은 하나의 소유물로 화현돼 자기 소유가 되지 않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는 모든 존재가 자기 내재율 속에 존재하고 소유물이 되기를 원하고 있고 그 원한 바를 실천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역 갈등, 이념 갈등, 빈부 갈등의 능선에서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형국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원자핵보다 더 작은 지식이 아닐까 싶다. 지혜의 문전에 들어가면 지식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은 지혜의 아들이다. 지식인 아들이 지혜의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것은 눈먼 거북이가 망망한 바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나무토막을 잡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고 불경에서 말한다. 발전한 물질문명은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물질에 대해 주인이 되지 않을 때 노예가 되는 것이다. 물질에 유혹된 의식은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탐욕의 뿌리를 완전하게 뽑아버린 사람이라야 자비를 구현할 수 있다. 탐욕은 가지려는 사람의 몸부림이요, 자비는 주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 부림이다. 갖고자 하는 욕망의 불을 끄면 주고자 하는 침묵의 삼매를 누린다. 자비와 구원이 내 속에 샘솟아 오르는 소리의 합창이 지구 저쪽 이쪽에서 메아리칠 때 세상은 한층 더 밝아질 것이다.
배우지 못해 지식이 없는 사람이야 무식해서 행동이 그렇다 해도 고등교육을 받고 많이 배운 고위층 관료나 재벌이 비리 등으로 우리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일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지난날 한 여성 국회의원의 친인척 보좌관 논란, 한 여성 변호사의 수십억 원짜리 변호로 인베스트 투자사기범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한 사건, 최근에도 대학교수가 여학생을 성추행해 고소당한 사건 등을 보면 차라리 이들이 배우지 못했다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걸 두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한다. 만일 첨성대에 올라간 학생이 초등생이라면 그저 철없이 한 행동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이기 때문에 질타와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