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21:14 (금)
빙수와 냉수 사이에서
빙수와 냉수 사이에서
  • 이주옥
  • 승인 2017.08.15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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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차가운 것을 함께 먹으며 따뜻한 사이가 되는 것.’ 어느 작가는 팥빙수 한 그릇을 먹으면서 이렇게 적었다. 빙수집 앞을 지나거나 직접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구절이다. 참으로 서정적이고 적절한 표현에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공감이 된다.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무더위에 차가운 음료나 시원한 음식은 누구에게나 환영받는다. 특히 하얗게 갈린 얼음 가루를 듬뿍 받아 안고 갖은 과일을 품은 빙수 한 그릇은 여름 음식의 압권이다.

 이름만 들어도 몸이 오싹해지는 국내 유명 빙수 가게는 매번 앉을 자리가 없다.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진풍경이다. 그곳에서 한 스푼 퍼먹는 빙수의 시원함은 땀 흘리며 기다린 시간을 상쇄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메뉴판에 적힌 이름들은 한국어와 외국어가 반반씩 섞인 퓨전이다. 특히 여름 과일을 포근히 감싼 콩가루는 얼핏 불협화음 같지만 그런대로 오묘하고 신기한 맛을 낸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대충 한 끼 밥값을 호가한다. 유명 호텔엔 일반 빙수 가게보다 몇 가지 재료를 더 얹어 심지어 5~6만 원 넘게 받는 빙수도 있다니 빙수의 위용이 실감 난다.

 예전 빙수는 기껏해야 질퍽하게 삶은 팥에 설탕 듬뿍 넣은 것이 전부였고 거기에 얼음을 강판에 직접 갈거나 또는 수동 기계로 부숴서 덮으면 아이들도 어른들도 만족스러웠다. 그것도 그나마 조금 살만한 집에서나 마음먹고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사이 수십 가지 메뉴의 아이스크림이 눈과 입을 호강시켰고 그것도 물리자 고급 빙수 가게가 앞다퉈 생겨났다. 추위를 느낄 만큼 시원한 인테리어에 멜론부터 바나나, 망고, 체리까지 각종 외국 과일은 물론, 우유로 만든 얼음 가루가 하얀 눈처럼 덮여 고급스러운 용기에 담겨 나온다. 팥으로 만든 것은 알게 모르게 천덕꾸러기로 밀려난 지 오래다.

 시나브로 변해 가는 것이 먹거리다.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변한 것이 사람들의 입맛이다. 양을 배제하고 질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무조건 배부를 만큼 양이 많은 것이 최고였으나 이제는 질적으로 또는 비주얼로도 좋은 먹거리를 찾아서 움직이는 추세다. 한 번을 먹고 한 개를 먹더라도 좀 더 고급스럽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겠다는 의식의 변화다. 그러다 보니 나날이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추는 노력이 가해졌을 것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하다못해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신종 직업까지 생겨나서 고기 한 점, 채소 한 개도 예술적으로 치장하고 장식하며 사람들을 우아함과 럭셔리의 늪에 빠지게 한다. 빙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시원하고 달콤하기만 하는 음식에서 영양을 고려하고 모양새도 예쁘게 해서 한 계절의 트랜드 음식으로 재탄생 시킨 것이다. 급기야는 여름 한 철이 아닌, 4계절을 망라한 디저트로 자리매김했다. 한겨울에 먹는 빙수야말로 별미라고 잔뜩 부추기면서 말이다.

 한낮의 더위가 오늘도 36도라고 예보한다. 밤사이 열대야로 시달린 탓인지 자꾸 차가운 것이 당긴다. 빙수집은 여전히 문전성시고 에어컨 빵빵한 커피집도 오전부터 사람들이 북적인다. 자꾸 차가운 것으로 내장을 훑어 내려 봐도 이제 그마저도 내성이 생겼는지 더위는 쉬이 사라지지 않고 체온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꾸 더 차가운 것을 원하게 되는 걸까. 이러다 북극에 떠다니는 얼음 덩어리라도 껴안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다르게 빙수에 얹은 과일은 종류도 다양해지고 하얀 얼음 가루는 더 수북하게 쌓여가며 말 그대로 설산이 되는데 사람들이 느끼는 깊은 갈증과 지구상 온도는 더 높아만 간다. 동네 가게 냉장고 유리문 안에 성에를 잔뜩 뒤집어쓴 채 나를 바라보는 것이 있다. 살얼음이 살짝 흘러내리는 생수 한 병. 순식간에 오싹한 시원함이 밀려든다. 오히려 값도 싸고 더위를 더 가시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고급 호텔의 6만 원짜리 고급 빙수 보다, 전문 빙수 가게의 화려한 빙수보다 더 속 편하고 시원할 듯싶다. 무더위, 성실한 노동의 끝에 쥔 냉수 한 병, 그 차가운 물 한잔 나눠 마시며 소박하고 따뜻한 사이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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