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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君制(봉군제)
2017년 09월 13일 (수)
송종복 sojobo@hanmail.net
   
▲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封:봉-분봉하다 君:군-임금 制:제-법도

국왕이 왕자와 공신에게 봉작과 봉군으로 ‘5등’과 ‘君’의 호칭을 내렸다. 고려는 상서령ㆍ중서령ㆍ태위(太尉)ㆍ사공(司空)을, 조선은 공ㆍ후ㆍ백ㆍ자ㆍ남(公ㆍ侯ㆍ伯ㆍ子ㆍ男)을 붙였다.

  

  봉건(封建)이란 분봉건국(分封建國)의 줄인 말이다. 이는 상위에 국왕이 군임하고, 그 밑에 제후들이 있고, 이 제후는 국왕에게 임명을 받아 일부 권한을 위임받아 통치한다. 그리고 제후는 기사(騎士)를 두고 기사로 하여금 국왕에게 충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말단에 농노를 둬 농경을 맡아 군량미를 준비한다. 이와 같이 삼각형의 계급제도인 국왕, 제후, 기사, 농노의 위계질서를 지켜 국가를 통치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봉건제가 없었다. 오직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나온 말이다.

 흔히 봉건시대 잔류물이니 또는 봉건시대 풍습이라 하는데 이는 큰 잘못이다. 주로 갑오개혁 때 봉건주의를 타파했다고 하는데, 이는 일제가 한국강점기에 우리나라 역사를 자기의 역사에 끼워 맞춰 부른 말이다. 서양과 중국 및 일본은 봉건제가 있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봉건제도가 있었다면 제후와 기사 및 농노가 있어야 할 텐데, 아직 그런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봉건제도가 없는데 아직까지 ‘봉건제’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봉건시대는 국왕이 왕자와 공신에게 봉작과 봉군을 ‘5등’과 ‘君’의 호칭을 내렸다. ‘君’은 봉군과 봉작이 있는데 봉군은 단일한 명칭이나, 봉작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의 차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경우 백제는 면중왕(面中王)ㆍ도한왕(都漢王)ㆍ불사후(弗斯侯)ㆍ면중후(面中侯) 등이 있었고, 고구려는 양국군(讓國君)ㆍ안국군(安國君) 등이 있었고, 신라의 경우는 이와 관련되는 기관인 상사서(賞賜署), 사훈감(司勳監)이 있었다.

 고려 초에는 원군(院君), 대군(大君), 군(君), 궁군(宮君), 낭군(郞君), 태자(太子), 후(侯) 등이 종실에게 봉해졌다. 그 후 ‘5등작’ 제도를 통해 종친을 공ㆍ후ㆍ백(公ㆍ侯ㆍ伯)에 봉작했다. 조선은 태조 7년(1398)에 친왕자(親王子)를 공(公)으로 삼고, 여러 종친을 후(侯)로 삼고, 정1품(正一品)을 백(伯)으로 삼았다. 태종 1년(1401)은 중국을 모방할 수 없다 해 공(公)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후(侯)를 군(君)으로, 백(伯)을 부원군(府院君)으로 고쳤다. 정종 1년(1399)부터 다시 봉작제를 회복해 1897년 대한제국 성립 때까지 계속 써오다가 일제강점기부터 사라졌다. 앞으로 각 문중의 조상 벼슬을 이에 준하는 작위를 붙여야 하는데 조상의 미화를 위해 마구 붙이는 것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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