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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揆園史話)는 어떤 책일까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어떤 책일까
  • 이헌동
  • 승인 2022.09.15 2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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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 추종자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위서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가원ㆍ손보기ㆍ임창순 같은 대학자들이 고서심의위원회를 열어서 진서 여부를 가린 결과 진서로 인정받았다. 전문 서지학자들도 진서라고 하였다.

식민사학 추종자들의 글을 보면 역사를 실증적으로 검증한다고 하지만 허위가 적지 않다. 문제는 식민사학 유풍으로 역사를 배운 사람이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규원사화에 관련된 것도 그러하다.

식민사학 추종자들은 천주(天主)라는 말이 있다고 하여 규원사화가 숙종 때의 글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규원사화에 보면 북애자가 천주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는 글이 있다.

"근래 명나라 만력(신종의 연호) 중에 이마두(마테오리치)란 사람이 있어서 광동으로부터 북경에 들어왔는데 서양의 수리와 역법의 책이 있었으니 중국 사신가는 행차를 따라 연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자들이 그 말을 전했었다."(<규원사화> 민영순 옮김 35쪽 참조)

이 헌 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 헌 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수광은 1614년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를 소개하고 있다. 규원사화가 1675년 저작된 것임을 보면 천주라는 말은 당시에 충분히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식민사학 추종자들의 주장이 식민사학을 옹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이들은 이병도나 신석호, 식민사학 유풍의 사학자들은 비판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밀정들이 밀고하게 하고 교묘하게 다루던 일제 고등계 경찰 앞잡이들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짓을 하여 대학교수가 된 인간도 있다. 식민사학 유풍에 젖어있는 인간들이 대학 강단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규원사화를 남한에서는 역사서로 다루지 않지만 북한에서는 중요한 역사서로 다루어서 고조선사를 정립하였다. 남한에서도 규원사화를 연구한 논문이 많이 나와서 고조선사가 정립이 되면 좋겠다.

남한의 식민사학 유풍을 지닌 사학자들은 신교에 관련된 종교적인 것으로 대종교 등에 결부하여 위서로 몰거나 종교사로 인식한다. 그러나 숙종 때는 대종교가 없었고 오래된 고대의 역사는 신의 이야기가 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신의 이야기 속에 역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문자로 기록되지 못하고 이야기로 전해 온 것을 뒤에 문자화하였기 때문이다.

규원사화는 1675년(숙종 2)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는 호를 가진 분이 쓴 역사책으로 규원사화서(揆園史話序)ㆍ조판기(肇判記)ㆍ태시기(太始記)ㆍ단군기(檀君記)ㆍ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이라는 책 이름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다.

작자는 서(序)에 책을 쓴 동기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울적한 심기를 달래려 전국을 유람하였는데, 주체적인 국사(國史)가 없는 것이 조선의 가장 큰 근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에 고려시대 학자인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震域遺記)>라는 책을 얻어서 여기에 중국 역사책에 전하는 여러 글들을 캐내서 사화(史話)를 만들었다고 한다.

작자는 유학자들의 사관은 주체성 없는 존화사대사상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주인정신이 깃든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나라 상고사를 재구성하였다. 작자가 참고한 책은 고려 말의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震域遺記)>다. 이 책은 고려 초 발해의 유민인 발해태자 대광현이 가져온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주체적으로 쓰여진 사서이다. <조대기>가 실재했던 고기임은 <세조실록>을 통해서 확인되므로, <진역유기>라는 책도 실제 있었을 것이다.

<단군기>에는 1대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부터 47대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단군의 왕명과 재위 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다. 단군왕검은 환웅의 아들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임금이 되어 수도를 길림(吉林)에 두었으며,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을 거느려 그 영토는 멀리 중국 산동과 요서(遼西)지방까지 다다랐다.

이 시기 문화도 발전하여 8가(八加)의 관료를 두고, 제천(祭天)을 시작했으며, 8조의 가르침을 지어 백성을 교화하였다. 2대 임금 부루(夫婁) 단군은 큰 홍수를 다스리고 중국의 순(舜)임금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여 옥저ㆍ비류ㆍ졸본을 거느리게 되었다. 도산(塗山)에서 하(夏)의 우(禹)임금과 만나 화해했다.

3대 임금 가륵(嘉勒) 단군은 하나라 왕이 덕을 잃어서 식달로 하여금 남국과 진번의 백성들을 거느려서 정복했으니 국가의 위력이 더욱 빛났다. 이에 하늘에 제사를 행했으며, 위엄스러운 덕이 흘러 넘치고 나라 사람들이 그 교화를 좋아하였다.

이후의 임금들은 치적이 많은 단군은 자세하게 그렇지 않은 단군은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47대 단군 고열가에 이르러 제후가 난립하여 왕위를 내려놓고 아사달에 은거하는 것으로 단군조선은 막을 내린다. 위의 글은 민영순이 옮긴 <규원사화>를 참고하여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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