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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자 이병도와 함석헌의 역사관과 삶
식민사학자 이병도와 함석헌의 역사관과 삶
  • 경남매일
  • 승인 2023.06.2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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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일제의 관점인 식민사관으로 역사를 연구한 이병도와 신석호가 해방 후 한국사학계를 장악하고 식민사학 카르텔로 역사 관련 정부 기관을 장악하여 역사를 오도하였다. 이런 식민사학의 역사관이 사람들의 가치관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들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 정권에 빌붙어 현실과 야합하는 삶을 산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일생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병도와 이완용은 본관이 같은 먼 친척이었다. 본관이 같았던 이운구 전 성균관대 교수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였다. "이병도의 부친인 이봉구가 이완용의 집사로 일했으며, 덕분에 이병도의 형인 이병희는 당대의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다."

이병도의 장인이 일제강점기 일본군 육군중장과 중추원 참의를 한 조성근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있고, 누이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는 윤치영의 부인이다. 윤치영 집안과 이병도 집안은 3중 사돈이 되는 대단한 친일집안에서 후손들도 출세를 많이 하였다. 이병도의 손자가 지금 학술원 회장을 하고 있다.

1956년 김창룡이 죽었을 때 그 묘비명을 이병도가 썼다. 김창룡은 일제의 주구로 독립운동가를 악랄하게 살육하다가 이승만의 주구가 되어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온갖 악횡을 일삼은 자다. 그런데 이병도는 호국의 영웅으로만 찬양하고 미화했다. 일제의 주구와 보도연맹 학살에 대해서 전혀 언급없는 이병도의 가치관과 역사관이 비판받는다. 이병도는 일제에 충성한 공로가 적힌 이완용의 관뚜껑이 원광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불태웠다.

이승만 정권에 협조하다가 이승만 정권을 축출한 1960년 4ㆍ19 혁명 후 과도정부에서는 문교부 장관을 하였다. 학술원 회장이 되어서 21년간 재직하면서 식민사학을 비판한 학자는 학술원 회원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야합하여 1979년 5ㆍ16 민족상을 수상하였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으로 8년간 재직하였다. 한평생을 권력에 빌붙는 삶을 살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의 이병도 서술에는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한 것과 김창룡의 묘비명을 쓴 것 등의 부정적인 것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든다. 식민사학 카르텔에 의하여 역사관련 정부기관이 장악되어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긴다.

평생을 바른 가치관으로 사셨던 함석헌 선생은 평양고보에 다니다 3ㆍ1 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1921년 민족 사학인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편입학하였다.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1928년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후진 양성을 하였다.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쓰다가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오산학교를 그만두었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약 1년간 고통을 당하고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1945년 11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의 배후자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1947년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월남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당하였다. 1961년 "5ㆍ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로 5ㆍ16 군사정변을 정면 공격하다가 1962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67년 장준하가 국회의원에 옥중 출마하는 것을 도와 당선시켰고 1970년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19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퀘이커 협회 초청으로 미국 종교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고 1981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씨알의 소리>가 폐간당하였다. 1987년 제1회 인촌상을 수상하고 상금 전액을 남강문화재단에 기탁하였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 `서울 평화 선언`을 제창하였다. 사후에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공부할 때 독립운동가인 안창호ㆍ이승훈ㆍ조만식 선생의 민족사관 영향을 받아서 그것이 역사관으로 정립되었다. 그래서 "단군이란 복잡해가는 사회의 변동기에 뛰어난 힘과 재주와 내다보는 생각과 어진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분이다. 사람 무리에 질서를 세우고 조직을 주어 처음으로 우리라는 생각을 해가며 살도록 지도했던 인물이다."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 책에 기술하고 있다.

반면에 이병도는 반도사관으로 국경을 한반도로 조작한 쓰다 소키치의 제자로 윤관의 9성을 함흥으로 왜곡한 식민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강단 역사학계에서는 쓰다와 이케우치의 학설이 통설로 그대로 교육되고 있다.

만약 이병도가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 사학자에게 교육을 받았더라면 역사관과 삶이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거나 교육할 때 역사관이 가치관으로 연결되어 삶으로 이어짐으로 바른 역사관을 정립하여 교육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민사학 카르텔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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