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7:47 (일)
고문귀신으로 불리는 하판락
고문귀신으로 불리는 하판락
  • 경남매일
  • 승인 2023.09.07 22:1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았던 것은 해방 후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고 살아남기 위해서 한 나쁜 행위였다. 친일 악질 경찰이나 매국노, 친일 부일 협력자,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경찰과 군인들, 이들의 후손이나 이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하였다.

문제는 이들과 아무런 상관없이 빨갱이 색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승승장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본 경우와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사관을 신봉하는 식민교육의 효과로 인한 것이다.

아직도 빨갱이 논리에 젖어있는 것이 보수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민잔재의식에서 벗어난 진정한 보수는 독립운동가를 존중하고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들을 징치하고자 하는 애국심이 충만한 사람이다.

노덕술이 고문왕으로 불리는 데 비하여 하판락은 고문귀신으로 불리운다.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다루었던 인물들이다.

일제 강점기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은 참회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다. 자신이 지닌 생명과 재산 등 모든 것을 받쳐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방후 독립운동한 분들은 홀대를 받고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니 가치관이 잘못 형성되어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주인으로 역사를 보면서 반민족 친일행위를 청산하는 데 힘을 보태는 삶이 바른 삶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된다.

하판락은 진주 지역의 유지 가문에서 태어나 진주고보를 졸업했다. 졸업 후 순사시험에 합격하여 1934년부터 일제의 경찰로 근무하였다.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는 일을 맡았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을 고문하면서부터 그 수법이 악랄하여 일제 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로 불린다. 진주 배둔병원장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고 회고하였다.

1943년 진우회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7명에 대해 자백을 강요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하여 피를 뽑아낸 뒤 그 피를 고문피해자에게 뿌린 뒤 다시 물어보았다. 답변을 거부하거나 자기가 기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렸다.

이런 착혈 고문 외에도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지는 고문도 하였다.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와 손가락 비틀기 고문 등으로 3명이 순국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신체 불구자가 되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방 후 하판락은 미군정의 일제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경남경찰청 회계주임으로 일본인들이 남긴 재산 처리에 관여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1946년 경남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하였다.

1949년 하판락의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운동가 여경수의 어머니가 반민특위에 고발하여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반민특위가 그를 부산에서 서울로 압송하려고 하자, 부산 시민들이 "당장 여기서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할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한다.

반민특위에 잡혀간 하판락은 고문 사실을 부인하였고,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났다. 그를 조사했던 조사관은 그 뒤 한국전쟁 중 통영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반민특위 활동이 무산되고 그 기능 일부가 법원으로 넘어가자 악질 고문 행위가 담긴 문서를 없애고자 조직적으로 발악했는데 진주법원의 방화에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석방 후 그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축재를 한 뒤 고향인 진주에서 도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하지만 친일 악질 고문 경찰의 이력을 아는 사람들에 의하여 낙선된다. 그 후 부산시 시의원에도 출마하나 낙선한다.

사업가로 신용금고사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다. 크고 작은 고향 일에 기부금을 내어서 고향을 빛낸 출향 인사로 변신했다. 부산에서도 노인복지 공로자로 표창을 받는 등 신분 세탁을 했다.

그러나 독립투사 이광우가 그로부터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평생을 불구자로 살다가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죄상이 다시 드러나게 된다. 하판락의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노령의 하판락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하였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여야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 명단을 발표했을 때 명단에 든 유일한 생존자였다. 하판락은 91세로 천인공노할 악행에 대한 처벌은 받지도 않고 악명 높은 잔악한 일생을 마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성진 2023-09-11 12:53:31
이 땅에 친일파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남한의 초대 대통령에 김구씨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625와 같은 동족상쟁의 참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쯤은 남북이 통일되어 강대국에 들어갔으리라 확신이 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애국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던 친일파 무리가 권력을 잡으므로 해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으며 지금도 존경하여 받들어 모셔야 할 홍범도 장군을 탄압하려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