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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
대한민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
  • 경남매일
  • 승인 2023.09.1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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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범 버네이즈 아마존출판대행 대표
한승범 버네이즈 아마존출판대행 대표

현재 우리나라의 풍요와 발전은 기적에 가깝다. 진부한 얘기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국가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외국 용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시간을 더 돌려 구한말의 조선인을 살펴보면, 가난과 무지로 인해 미래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구한말 조선의 문맹률은 90%에 달했다. 외국인들은 조선인의 게으르고 비위생적인 모습에 놀랐다. 아낙네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활보했으며, 거리에는 오물이 넘쳐났다. 서양인의 눈에 미개해 보이는 조선인의 사진들이 지금도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보이는 비참한 광경은 불과 100년 전까지 이 땅에서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한반도는 공산화 위기에 직면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세계 최대의 공산주의자들인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미 북한은 소련군이 진격해 점령하고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다. 남한은 최빈국 상태였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백주 대낮에 활보했고, 남노당이 건설되어 사실상 공산화가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보였다.

남한 인구의 77%를 차지하는 농민은 '지주를 때려잡고 농민이 주인이 되는' 공산주의 사상에 푹 빠져들었다. 1945년 남한 전체 농가의 86%가 소작농이었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후 토지 조사를 한 정부 관료는 "6명의 대지주가 전국 땅을 좌지우지하고, 나머지는 사찰 땅이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중국 공산당과 북조선에서는 이미 '무상 몰수, 무상 분배'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죽하면 6.25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며칠 내로 대한민국의 농민과 좌익 세력이 북한군에 호응해 폭동을 일으켜 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을까. 김일성은 남침 당시 전쟁 승리를 100%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았다. 북에는 '적토마를 타고 온 김일성'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이 있었다. 그는 구한말 일제에 맞서다 사형 선고를 받고 대한제국의 밀사로 도미한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유상 몰수, 유상 분배'라는 농지개혁을 실행했다. 지주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해 소작농에게 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에서 전향한 죽산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며 농지개혁을 밀어붙였다.

말이 '유상 몰수, 유상 분배'지만 사실상 지주에게 땅을 강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농지개혁법이 1950년 5월에 마무리되었고, 소작농들은 꿈에 그리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바로 뒤에 6·25 전쟁이 터졌지만 농민들은 대한민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공산화되면 소련처럼 결국 집단 농장화되어 소작농보다 못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말 한국 전체 경지 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농지가 1951년 말에는 96%로 치솟았다.

첨언하자면 아직도 일본 극우 정치인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가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을 이뤘다는 망언을 하고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한국인의 문맹률은 80%에 달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문맹률은 고작 10%만 떨어졌을 뿐이다. 반면에 1959년 한국인의 문맹률은 10%로 비약적으로 떨어졌다.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쉽게 알 수 있고,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국민에게 진심이었는지 증명한다. 일본은 조선인을 단지 노예 취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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