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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대사탑비의 임나는 금관가야인가
진경대사탑비의 임나는 금관가야인가
  • 경남매일
  • 승인 2023.11.3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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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 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신라 경명왕이 직접 비문을 짓고 진경대사의 문하승인 행기가 글씨를 쓴 경명왕 8년(924년)에 세워진 진경대사탑비 원문은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氣?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로 되어있다.

이 비문을 근거로 조선총독부에서 한반도에 임나가 있었다는 증거로 임나왕족기록을 제시한 논리가 "진경대사는 신라의 신김씨로 선조는 임나왕족이고 김유신을 먼 조상으로 한다. 김유신이 금관가야 왕족이기에 임나는 금관가야 즉 일본서기의 '남가라'다." 이것이 지금도 강단사학의 통설로 가야가 임나라는 논거다.

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인 도명스님은 경남매일의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탑비의 새로운 해석> 칼럼에서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신김씨이며 그 선조는 임나왕족 초발성지인데, 매번 주변국 병사들에게 괴로움을 받다가 우리나라의 먼 조상 흥무대왕에게 투항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

그 연유를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초발성지가 김유신이 아닌 아국(我國)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하면 신라(我國)의 먼 조상 김유신을 진경대사의 조상인 임나국 왕족의 후예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김유신의 탄생은 서기 595년이고 가야는 이미 63년 전인 532년에 멸망하고 없었다. 가야와 임나가 같은 나라이면 가야가 멸망하면 당연히 임나도 없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김유신을 칭송하는 "鼇山?氣~" 부분의 주어가 생략된 것은 흥무대왕이 바로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도 도명스님의 해석에 동의하는 것이 "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 "우리나라의 원조 흥무대왕에게 투항했다"는 해석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신라 경명왕 8년(924년)은 신라의 국력이 쇠퇴하여 경상도 일부 지역을 다스릴 정도로 왕건의 고려와 견휜의 후백제에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던 시절이다. 그래서 이 비문을 직접 지은 경명왕 관점에서 보면 통일신라의 위업을 이루어서 흥무대왕의 칭호를 받은 김유신을 통일신라의 원조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글을 지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신김씨였다(俗姓新金氏)"고 하는데, 만약 김유신이 진경대사의 선조라면 신김씨로 불려야 한다. 그러나 이현태의 <신라 중대 신김씨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학회, 2006) 논문에 의하면 삼국사기 기록을 분석한 결과 "김유신은 신김씨를 사용하거나 신김씨로 불린 적이 없어서 김유신과 신김씨는 연결하기 어렵다"고 한다. 신김씨인 진경대사와 김유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선조는 임나왕족 초발성지"(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라고 하였다. 진경대사가 김유신의 후손이라면 김유신의 선조인 김수로왕이 초발이 되어야 한다. 김수로왕이 초발로 불린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초발(草拔)은 '풀을 뽑다'는 의미로 처음을 뜻하는 수로(首露)와 같은 의미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흥무대왕에게 투항한 것을 흥무대왕의 후손으로 오역함으로서 진경대사를 김유신의 후손으로 하여 가야가 임나라고 조선총독부에서 해석하여 지금도 강단사학의 통설이 되어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529년부터 645년까지 임나는 멸망과 부활을 거듭한다. 그 당시 일본에 있던 임나의 왕족이 신라의 김유신에게 투항하고 신김씨를 하사받은 것이 아닐까?

도명스님의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탑비의 새로운 해석> 칼럼에 대하여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부산일보에 <반지성주의적 역사 왜곡을 경계한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였다.

이근우 교수는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신김씨(新金氏, 김해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자 초발(草拔, 수로왕)의 성스러운 가지이다. 이웃 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신라)에 투항하였다. (스님의) 먼 조상인 흥무대왕(김유신)은…"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하여 도명스님은 "이근우 교수는 6월 25일 자 <전남매일>을 통해 '초발은 처음 나타났다는 뜻을 가진 수로(首露)의 또 다른 한자 표기'라고 했는데, 초발(草拔)은 '풀(草)을 뽑다(拔)'라는 의미일 텐데 어떻게 '처음 나왔다'는 수로(首露)와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는가.

비문 첫 부분의 해석에서 벌써 이런 문제가 드러난다. 첫 단추가 이러한데 다음 구절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가 반지성인지, 누가 역사 왜곡을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는 반박의 글을 부산일보에 기고하였다.

역사 사실이 아닌 것 즉 초발이 수로라거나 김유신이 신김씨로 불린 적이 없는데도 신김씨로 규정하는 것, 임나가량이 대가야라는 사실이 없음에도 함부로 규정하는 것 등이 반지성이고 유사역사학을 하는 것이 아닐까?

강단사학은 진경대사탑비의 임나왕 초발(草拔)을 김수로왕으로 규정하는 유사역사학에서 <일본서기>나 <고사기>, <신찬성씨록>, <풍토기> 등을 비롯한 일본문헌에서 찾는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유사역사학으로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언제쯤 이런 가야사 연구자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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