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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⑨
근대 어업의 발상지 욕지도 ⑨
  • 경남매일
  • 승인 2024.02.0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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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욕지도의 부속섬인 하도내도에도 일본인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은 부산수산회사에서 시키시마촌을 건설했던 곳이다. 주로 홍합을 가공하여 통조림으로 만드는 공장이 많았으며, 공장은 자가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현장감독의 사택도 있었는데 사택 건물 뒤뜰에는 욕지도의 옥섬처럼 '카미사마(神樣)'를 모시던 사당(祠堂)이 있었다.

욕지도의 일본인들을 조선인에 비해 어로기술이나 자본에서 그야말로 '갑'의 위치에 있었다. 멸치잡이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모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인의 어로기술이나 어법을 조선인들이 배워서 따라갔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어로기술 뿐 아니라 금융시스템도 전파했다. 일본인들 중에는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채업자들이 있었는데, 돈을 빌리면 반드시 제 날짜에 상환하거나 이자를 지불해야한다는 금융원리를 심어주었다.

욕지도의 어획물은 초기에 만주나 중국으로 수출이 되었지만 점차 일본 본토가 주 소비처가 되어갔다. 자부랑개에는 어획물의 보관을 위해 얼음창고가 있었고 전복, 해삼을 가공하는 공장도 있었다. 과거 조선인들은 먹지 않던 수산물이 일본인들 때문에 재발견된 것도 있다. 대표적인 어종은 쥐치인데 포를 만들어 말린 것(쥐치포)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또, 한천의 원료인 우뭇가사리는 소의 털과 비슷하게 생겨 '우모초'하고 하였고 끓인 다음 식히면 얼음처럼 굳는다고 하여 '해동초'라고 했지만 식용으로 그리 인기 있는 해초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 때문에 돈이 되었고, 건조 우뭇가사리는 일본의 고베, 오사카로 수송되었다.

욕지도에 처음 정착했을 때는 옥수수를 많이 경작했지만 일제강점기 고구마가 전파된 후로는 고구마가 보리와 함께 주요 식량이 되었다. 욕지도의 고구마 전파경로는 확실치 않지만, 전남의 거문도에서 1916년 3월에 집집마다 종자를 배급하여 최초로 재배했다는 기록(삼산면지)으로 미루어 보면 그 즈음이 아닐까 추측된다. 고구마가 전파된 이후 욕지도에는 과자공장, 고구마 전분공장, 소주공장도 생겨났다.

자부포의 심상소학교는 일본인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고, 조선인 학생을 위한 학교교육은 1924년 5월 4학급으로 편성된 원량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이후였다(욕지면지). 100여 가구 중 6가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일부 부유한 조선인 학생은 골개의 원량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자부포의 심상고등소학교를 진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자연마을단위의 서당에서 공부했다. 그 당시 서당이 20곳이나 됐다(욕지면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자부랑개에서는 조선인 어린이와 일본인 어린이들이 차별없이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욕지도의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일본식 놀이들이 많이 유행했다. 마리진토리, 덴까이, 오재미 던지기, 공깃돌 놀이 등을 하고 일본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한다.

마리(まり)는 실로 감싼 공이고, 진토리(陣取り)는 가위, 바위, 보를 해 이긴 사람이 자신의 손을 땅에 뻗어 차지하는 땅따먹기 놀이다. '텐가이(てんがい)'는 일정한 공간을 여러 개 직사각형으로 나눈 다음 각 사각형마다 끝부분에 수비가 방어하고 공격자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게임인데 오징어 게임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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