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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폭탄 사기가 낳은 배터리 강국
수소폭탄 사기가 낳은 배터리 강국
  • 경남매일
  • 승인 2024.02.14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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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6·25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1부터 1953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수소폭탄 개발이 진행되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핵실험'까지 한 사실이 있었다. 그 실험이 성공했다면 한반도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인데, 다행히 그 실험은 실패했다.

전쟁 중인 1951년 6월, 재일교포 김일청이라는 사람이 부산의 해군본부를 찾아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일본에서 원자탄을 개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오카다(岡田)라는 일본인이 있는데 중국과 소련이 서로 초빙해 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군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우리측 해군 고위 간부들이 경무대(청와대의 전신)의 허락을 받고 해군함정을 일본에 보내 환갑의 나이인 오카다를 데려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장군을 통해 당시로서는 거액인 10만 달러를 내놓으며 '꼭 성공해 북진통일을 이루자'고 신신당부했다.

곧 '해군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오카다는 '크게 써먹는다'는 뜻에서 '이용대'라는 한국 이름과 해군 대령 계급장을 받았다. 무인도에는 그를 위한 개인연구소 건물이 따로 세워지고 정부와 해군은 자금과 인력을 전폭 지원했다. 현역 해군장교 중에서 물리·화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 연구소에 합류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53년 어느 날, 오카다는 '소형 수소폭탄'을 완성했다고 보고했고, 며칠 뒤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각료와 군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해 앞바다에서 수소폭탄 실험이 이뤄졌다. 모두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기를 기대했으나, '퍽'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작은 물결만 일어날 뿐이었다. 실험이야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지만, 손원일 참모총장은 아무래도 의심이 되어 해군 기술 장교 전완영(29, 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 훗날 원자력발전 최고 권위자가 됨)에게 오카다를 감시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수소 폭탄이란 1차 폭약(우라늄)을 기폭제로 초고열, 초고압 환경을 만들어 2차 폭약(중수소, 삼중수소)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원리로 삼아 만들어진 열핵폭탄(Thermonuclear bomb)이다. 전완영은 오카다의 실험이 그냥 물 분해해서 나온 수소를 모아서 폭발시킨 것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상부에 보고한다. 실제로 오카다는 수은정류기 제작이 전문이었기 때문에 물을 전기 분해해 수소와 산소를 빼내는 전문가였던 것이다. 즉 '수소폭탄'이 아니라 '수소'를 만드는 기술자였던 셈이다.

오카다의 사기는 들통났지만 그의 기술은 꽤나 쓸만했다. 오카다에 의해 수은 정류기가 만들어지고, 이는 우리나라 축전지 개발의 기틀이 됐기 때문이다. 해군 기술 연구소는 대통령에게 건의해 연구 개발 방향을 배터리 개발로 틀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해군기술연구소는 민영화되어 여러 번 주인과 이름이 바뀌다가 1978년 세방 전지(주)로 사명을 바꿨다. 세방전지는 차량용 축전지 '로켓배터리'를 만드는 회사지만 잠수함용 배터리를 만드는 군수 산업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최강 배터리 왕국은 이렇게 '사기 핵실험'에서 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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