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1:53 (일)
징비록 이야기
징비록 이야기
  • 경남매일
  • 승인 2024.03.20 21: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김제홍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1598년 10월,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벌어진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날아오는 탄환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기 직전,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기록의 출처가 '징비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영의정·도체찰사·비변사와 훈련도감 도제조 등을 역임했지만, 전란 대비를 못 했다는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실각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징비록(懲毖錄)'을 기술했다.

1969년 11월, 대한민국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서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황을 기록한 책으로 난중일기와 함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인 기록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조정의 실책,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 등을 담고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전개와 공과를 평가하는 데 사용되었다.

징비록은 조선뿐 아니라 일본까지 전해져 널리 읽혔다. 징비록이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고 알려졌지만, 17세기에는 이미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합작해서 조선문헌을 대량으로 일본으로 유출하고 있었다.

일본판 '조선징비록'은 1695년 일본 교토(京都)의 출판업자 야마토야 이베에(大和屋伊兵衛)가 한문에 일본어식 훈독을 달아 간행하였다. 그 후 최소 30여 종 이상이 일본에서 발간되면서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 그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조선징비록을 통해 비로소 일본은 왜란 당시 조선 측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진주성(晋州城)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격전에서 왜군에게는 '모쿠소(木曾)'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무장 김시민(金時敏)이 실은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모쿠소(木曾)는 일본인들이 이름으로 착각한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牧使)를 음차한 것이었다.

일본인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이 '조선징비록'에 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쟁을 너무 좋아하는 것과 전쟁을 잊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 도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너무 좋아했기에 망했고, 조선은 전쟁을 잊었기에 망할 뻔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스페인에서 전래한 인쇄 기술과 조선 인쇄 기술의 영향으로 대량 상업 출판이 시작되었다. 근세 일본의 지적(知的) 르네상스기라고 부르던 시기, 출판인들은 일본의 옛 문헌뿐만 아니라 중국·조선·네덜란드 등 외국 문헌을 가리지 않고 책을 찍어 상품으로 판매했다.

'조선징비록'은 19세기 말 일본에 체류한 중국학자 양수경에 의해 청나라에 전해지고, 또한 같은 시대 주일 영국 외교관 윌리엄 조지 아스톤이 그 책의 내용을 영문 저술에 인용하는 등 임진왜란을 다룬 책으로서는 가장 높이 평가되고,가장 널리 알려진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