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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릉비의 편년체 서술 방식
광개토태왕릉비의 편년체 서술 방식
  • 경남매일
  • 승인 2024.03.2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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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 변조 목적 분명
정한론·임나일본부 고착 의도
왜는 고구려 눈치 보는 나라
편년 무시한 모든 주장은 허구
도명스님
도명스님

인간 사이의 갈등과 투쟁은 원시 시대부터 쭉 있어 왔다. 인간을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성적인 존재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인간이란 생존을 위한 본능이 앞서는 동물이다. 구석기 시대 이후 인간은 씨족이나 부락이라는 공동체를 이뤄 살았는데 때때로 이웃 집단과의 갈등들은 이후 대규모 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전쟁은 2등이 없는 승자독식의 게임이라 이긴자는 상대의 영토와 함께 백성들도 노예로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 전쟁에는 어떠한 원칙도 없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이겨야 했는데 이를 위해 쓰여진 책이 병법서다.

고대로부터 여러 병법서가 전해오지만 가장 유명한 병법서는 중국 춘추전국 시대 제나라의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으로 미국 육군 사관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전쟁과 전략에 대한 핵심을 말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가장 뛰어난 장수는 전쟁을 하기 전 승리한다'라든지 '적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번 싸워도 패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적을 이기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말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간자(間者)를 이용한 전술이다. 간자란 세작(細作)이라고도 하며 요즘으로 하면 간첩 즉 스파이다. 사실 전쟁이란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약화시키는 것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에 조금 비겁해 보이지만 간자가 전쟁의 승패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다.

19세기 말 일제는 사카와 가게아키를 비롯한 여러 명의 스파이를 청나라에 보내 나라 안의 동향을 정탐했고 이를 통해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한의사로 위장해 활동하던 그는 1883년 만주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현장으로 가 탁본을 입수했다. 다음 해 그는 탁본을 가지고 참모본부로 갔고 요코이 다다나오를 비롯한 관제 사학자들은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비문을 변조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들이 비를 변조한 목적은 무엇이고 어떠한 관점에서 또 어떠한 방법으로 변조했는지 그들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변조의 목적은 한반도를 정벌한다는 정한론과 그 도구인 임나일본부를 고착하기 위한 것이었고, 변조의 방법은 삭제, 가획, 부분적 석회도부였다. 또 변조를 통해 그들이 노린 것은 우리 국민의 자긍심을 꺾는 것이었는데 완전히 주효했다. 그들이 비문의 첫 해석을 세상에 내놓고는 사람들에게 태왕의 위대한 업적보다는 '渡海破'가 나오는 <을미년조>와 '任那加羅'가 나오는 <경자년조>에 관심을 가지게 유도했는데 이후 국내외 연구자들은 이 프레임에 빠져 계속 헤매게 되었다.

그들의 의도는 비문을 교묘히 변조해 상대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왕의 연호인 영락(永樂)으로 편년(編年)을 기록한 비문의 서술 방식을 애써 무시하고 을미년에 일어난 사건을 마치 신묘년에 일어난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고구려에 조공(朝貢) 온 왜를 백제와 신라를 침략해 신민(臣民)으로 삼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인 것처럼 왜곡시켰다.

한편 비문 연구를 하려면 문맥에 맞게 문장을 재구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탁본을 통해 변조를 밝히고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사실 문맥만 본다면 약간은 이상해도 말이 되는 듯한 주장들도 간혹 있다. 그러나 탁본에서 새롭게 발견된 <병신년조> '討倭殘國'에서 '倭' 자의 존재를 모른 채 아무리 주장을 펼쳐도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역사 연구에 있어 믿을 만한 근거가 나왔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역사꼰대가 되고 만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渡海破'가 나오는 부분이 신묘년에 일어난 일인지 을미년에 일어난 일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왜의 존재가 신묘년에서부터 겨우 고구려의 눈치나 보며 조공 온 집단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비문에서 분명히 영락 5년 을미년(永樂五年 歲在乙未)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이 기본적인 사실조차 간과하고 있다.

능비에서 말하는 진실은 왜가 고구려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백제와 신라보다 늦은 영락 1년인 <신묘년>부터 겨우 '조공 온 한 수 아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락 5년 <을미년>에 두 파렴치 백제와 왜가 연합해 고구려 몰래 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으려 했기에 영락 6년 <병신년> 태왕이 직접 왜와 백잔을 토벌(討倭殘國)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능비의 내용과 편년으로 된 서술 방식을 보면 고구려인의 기상을 닮아 솔직 담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편년을 무시한 모든 주장은 진실과 멀어지게 진다. 또 첫 문장 내용이 '왜의 조공'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반드시 헤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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